● '종로, 어느 분식점에서 아우와 점심을 하며'/ 황지우 국수 두 그릇과 다꾸왕 한 접시를 놓고 그대와 마주 앉아 있으니 아우여, 20년 전 우리가 주린 배로 헤매던 서방 고새기 마을 빈 배추밭이 나타나는구나 추수가 수탈이었음을, 상실이었음을 그때 우리는 몰랐어도 다 거두어 간 뒤의 허한 밭이 우리에게는 더한 풍요였다 내 입으로 벗긴 배추 등걸을 어린 그대에게 먹일 수 있었다 그대가 곱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경계가 있고 찬 저녁 노을이 우리를 몰아낼 때까지 거기가 할퀸 우리 땅임을 몰랐으므로 아우여, 이농의 허천난 후예로서 우리는 가시 돋친 탱자나무 울타리 안을 노려보며 땅강아지 같이 살아왔다 거지와 도둑이 사는 마을, 닐니리 동네와 철로변 하꼬방촌을 전전하며, 땅 바깥으로 삶을 내동댕이치는 울타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