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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시 모음

려니하하 2023. 12. 13. 16:57

연탄 한 장외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씁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안도현, 『높고 외롭고 쓸쓸한』, 문학동네, 2004년, 12~13쪽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문학동네 / 안도현 시집 [ 외롭고 높고 쓸쓸한 ]



모항 가는 길 / 안도현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윈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 쳐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짓밥 먹다가 석삼 년 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 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이 길은 말하자면
좌편향과 우편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데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너는,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 폭으로 걸어 두고
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오겠지
아니, 몸에다 마음을 비벼넣어 섞는 그런 것을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줘야 아나?
걱정하지 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 속에 들어와 있을테니까

<식구>

                        안도현



두 마리 비오리가

연못을 건너가고 있다

연못 기슭까지 날개가 닿는

커다란 새 두 마리를 데리고

구질구질한 가난도 캄캄한 서러움도 없다는 듯이

푸진 저녁밥상을 차리던 내 어머니같이

그 옆에 말없이 앉은 아버지같이

미끄러지듯 경쾌하게

(물속에 잠긴 두 발은 마구 세상을 긁고 있겠지만)

물 바깥의 자태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건너가고 있다

두 마리 비오리는

(잘 익은 까마중 같은 눈으로 먹이를 찾느라 두리번거리겠지만)

암컷의 뱃속에서 여물어가는 알이

차돌처럼 단단해질 때까지는

건너가겠다는 듯이

-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 (창비, 2008)

<겨울 숲에서>

                             안도현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들도 모두

그래서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 마음속 헛된 욕심이며

보잘것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발 속에다

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돌아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

그때까지 내 할 일은

머리끝까지 눈을 뒤집어쓰고

눈사람되어 서 있는 일입니다


-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푸른숲, 1991)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안도현


두꺼비가 바위틈에 숨어 혼자 책 읽는 소리
복사꽃들이 가지에 입술 대고 젖을 빠는 소리
버드나무 잎사귀는 물을 밟을까봐 잠방잠방 떠가고
골짜기는 물에 연둣빛 묻을까봐 허리를 좁히네
눈썹 언저리가 돌처럼 무거운 사람들아
이 세상 밖에서 아프다, 아프다 하지 마라
산은 높아지려 하지 않아도 위로 솟아오르고
물을 깊어지려 하지 않아도 아래로 흘러내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