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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저정주시

려니하하 2025. 3. 19. 13:09

바다



서정주



귀 기울여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 위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 데도 없다.



아― 반딧불만 한 등불 하나도 없이

울음에 젖은 얼굴을 온전한 어둠 속에 숨기어 가지고…… 너는,

무언의 해심海心에 홀로 타오르는

한낱 꽃 같은 심장으로 침몰하라.



아― 스스로이 푸르른 정열에 넘쳐

둥그런 하늘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 바다의 깊이 위에

네 구멍 뚫린 피리를 불고…… 청년아.



애비를 잊어버려

에미를 잊어버려

형제와 친척과 동무를 잊어버려,

마지막 네 계집을 잊어버려,



아라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 가라 아니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



오― 어지러운 심장의 무게 우에 풀잎처럼 흩날리는 머리칼을 달고

이리도 괴로운 나는 어찌 끝끝내 바다에 그득해야 하는가.



눈 뜨라. 사랑하는 눈을 뜨라…… 청년아,

산 바다의 어느 동서남북으로도

밤과 피에 젖은 국토가 있다.



아라스카로 가라!

아라비아로 가라!

아메리카로 가라!

아프리카로 가라!



ㅡ『사해공론』(1938년 10월호)에서


시낭송 바다 서정주.m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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