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지 않은 풍경
최영미
어디론가 갈곳이 있어
달리는 바퀴들이 부러웠다 .
앞만 보고 질주하다
길모퉁이에서 부드럽게 꼬부라지는
빨갛고 노란 불빛들이 부러웠다.
비에 젖은 8차선 대로는 귀가하는 차들이
끊이지 않고
신호등을 읽었다면
멈출 때를 알았다면
나도 당신들의 행렬에 합류했을지도.......
내게 들어왔던 , 내가 버렸던 삶의 여러
패들은
멀리서 보니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하얀 가로등 밑의 물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져
보석 같은 빛을 탁탁 튀기며
지루하지 않은 풍경을 만들고
반짝이는 한 뼘의 추상화에 빠져
8월의 대한민국이 견딜 만한데
이렇게 살면서 , 불의 계절을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
비 오는 밤을 젖지 않고
감상하는 방을 주신 신에 감사하며,
독한 연기를 뿜었던 입 안을 헹구고
내 밑에서 달리는 불빛들을 지웠다 .
--2009년 ( 주 )문학동네 도착하지 않은 삶
새
최영미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신발도 신지 않고
외투도 걸치지 않고
배고프면 먹이를 찾고
때가 되면 짝을 찾고
몸이 시키는 대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집을 짓고 알을 낳고
어느 겨울날
재수없이 바퀴에 깔려
피범벅이 되어도
새는 후회하지 않는다
제 살을 파먹으며 아파하지 않는다
한여름날의 꿈
최영미
내 아무리 도도한 취기로
깊이깊이 흐른들
내 손끝에도 닿지는 못하겠지
내 아무리 여름 한낮의 낮잠처럼
납작하게 널브러져 닳아 없어진들
내 마음에 포를 뜨지는 못하겠지
토하고 토해내도 다시 또 고여오는
갈증으로 회한으로 가슴만 불러오는데
모른 척,
문턱을 넘어가는 한줄기 바람
내 속의 너를 죽이고
널 닮은 시라도 잉태해
가까이 품을 수 있다면.....
자기만의 방
최영미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쌓이지 않는다
시간은 벽에 튕겨서 돌아온다
탈출할 용기가 없어
벽을 넘지 못하고
날개가 있는데도 날지 못하고
달력만 넘기며
없는 것들만 갈망하다 고장난
수리가 불가능한 인생!
- 시집 [공항철도 ] 이미, 2021. P 75
마법의 상자
최영미
여행 가방은 괄호 상자.
무엇을 넣어도 꽉 차지 않는,
47년 하고도 5개월 된
진부한 고민들을 55×40×20Cm의 사각형에 밀어 넣고
날아오르는 꿈.
엉망으로 구겨진 삶도 비행기 바람을 쐬면
반듯하게 펴진다는
마술을 믿는 자는 행복하다
흰 구름이 솜이불처럼 깔린
1만 2천 미터의 하늘을 내려다보며
닭장 속의 닭처럼 안전하게
먹고 싸는 지루함이여!
출발처럼 출렁이는 도착은 없다
기름진 군만두 같은 아메리카의 도시들을 포식하고
맥주보다 쓰디쓴 기억들을 알코올로 소독한다
가벼워진 생애를 다시, 괄호 안에 묶는다
짐을 다 덜어내도 무거운
여행 가방은 마법의 상자
영원히 잠들지 않는 침대
- 시집 [ 아름다움을 버리고 돌아와 나는 울었다 ] 이미출판사, 2024. P 9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