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에 걸려온 전화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 정일근,『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시와시학사, 2001)
나에게 사랑이란
정일근
마음속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기에 젊은 날엔 그대로 하여 마음 아픈 것도
사랑의 아픔으로만 알았습니다
이제 그대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냅니다
멀리 흘러가는 강물에 아득히 부는 바람에
잘 가라 사랑아,
내 마음속의 그대를 놓아 보냅니다
불혹, 마음에 빈자리 하나 만들어놓고서야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일이어서
그 빈자리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어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나도 알게 되었나 봅니다
분홍 꽃 팬티
정일근
어머니 병원 생활하면서
어머니 빨래 내 손으로 하면서
칠순 어머니의 팬티
분홍 꽃 팬티라는 걸 알았다
어머니의 꽃피던 이팔청춘
아버지와 나눈 사랑의 은밀한 추억
내가 처음 시작된 그곳
분홍 꽃 팬티에 감추고 사는
어머니, 여자라는 사실 알았다
어느 호래자식이
어머니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했나 성 을 초월하는 거룩한 존재라고
사탕발림을 했나
칠순을 넘겨도
팔순을 넘겨도
감추고 싶은 곳이 있다면
세상 모든 어머니는 여자다
분혼 꽃 팬티를 입고 사는
내 어머니의 여자는
여전히 핑크 빛 무드
그 여자 손빨래하면서
내 얼굴 같은 색깔로
분홍 꽃물 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