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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시 모음

려니하하 2024. 1. 18. 04:42

나무 한 권의 낭독

                                고영민


바람은 침을 발라 나무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언제쯤 나도 저러한 속독을 배울 수 있을까

한 나무의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녘이

한 권의 감동으로 오래도록 붉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저렇게 너덜너덜 떨어져 나갈까

이 발밑의 낱장은 도대체 몇 페이지였던가

바람은 한 권의 책을 이제

눈감고도 외울 지경이다

또 章장들이 우수수, 뜯겨져나간다

숨진 자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바람은 제 속으로 떨어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받아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낱장은 손때 묻은 바람 속을 날다가

끝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밟힌다

철심같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인적 드문 언덕에 구부정히 서서

제본된 푸른 페이지를 모두 버리고

언 바람의 입으로 나무 한 권을

겨우내 천천히 낭독할 것이다

고영민 <악어>.2005.실천문학




밥그릇

고영민

밥하던 아내가
포개진 밥그릇이 빠지지 않아
나에게 들고 왔다
그릇이 그릇을 품고 있다
내 안에 있는 당신의 아픔
당최, 힘주어 당겨도 꼼짝하지 않는다
물기에 젖어 안으로 깊어진 마음
오늘은 저리 꼭 맞았나 보다
한 번쯤 나는 등 뒤에서 너를 안아보고 싶었네
선반 위,
씻긴 두 개의 밥그릇이
봉분처럼 나란하다


저녁으로

고영민


누가 올 것만 같다
어두워져가는 저 길 끝
누가 올 것만 같다

조금만 기다리면
조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일어설 수 없다
가버리면 영영 후회할 누가 올 것만 같다
청미래덩굴 너머
길은 조금씩 지워지고
뭉개지고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는 오고
손짓하고
소리치고

지워지고 있다
기다리는 내가 지워지고 있다
누가 올 것만 같아 기다린 내가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게
지워지고 있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다
누가 올 것만 같아

돌아보는 사이, 돌아눕는 사이

고영민

큰비 오고 나자
담장 위 능소화가 온통 바닥에 꽃을 쏟았다
내가 돌아보는 사이,
내가 돌아눕는 사이,

쥐고 있던 손모가지 턱, 놓아버렸다
이젠 꽃도 버겁다
꽃을 팽개친다
하늘로 밤새 접은 말잠자리나 날리러 가자
하지만 꽃은 태연히
찬 바닥, 젖은 두 무릎 모으고 앉아
훌쩍훌쩍, 눈물만큼
그 꽃만큼

이빨 자국처럼
며칠 낮밤을 한사코 줄기도 없이 피어 있다

쉿, 보름달

                       고영민


​누가 지상을 향해 저리 큰 손전등을
내려 비추고 있는가
북방산 개구리가 둠벙으로 모인다
물이 고여 있어 알이 유실 될 리 없는 웅덩이
밤길을 틈타 수백 마리의 개구리들이
4차선 길을 건너고
또 수백 마리의 개구리들이 차에 밟혀 죽는 밤
첨벙첨벙, 문을 두드려 열리는
저 수면의 환한 열락(悅樂)!


따듯한 둠벙 속,
수컷은 암컷을 등 뒤에서 껴안고 방사를 한다
밤새 손전등을 들고 서 있던 얼굴 하나가
지상에 내려와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부화한 올챙이들이 얕은 물가로 모이고
물 밖으로 처음 나온 왕잠자리의 유충은
천천히 우화(羽化)를 시도했다


새벽녘, 달빛은 흐뭇하게 웃음을 문다
또닥또닥, 둠벙의 이불을 다시 끌어당겨 덮던
하늘이 잠시 빛을 꺼둘 때,
개구리들이 다시
해가 오르는 북방산 기슭을 향해
쉼 없이 뛰기 시작했다

-『서정시학』2006년 봄호.

수국 

                     고영민


비가 와 수국(水菊) 향은 더 짙어지고
그 향이 당신에게 다녀가는 동안
수국은 고스란히 비어 있지
에돌고 에돌아 당신에게 가는
거리만큼


수국은 비어 있지
해 질 무렵, 나는 텅 빈 당신을 생각해보고
물종지 같은 당신을
오래오래 생각해보고


주머니 속
쥐고 있던 마른손을 꺼내어
젖은 허공에 펴보는 꽃이여
아, 수국은 참으로 멀리도 다녀갔지
지그시 문을 들어
열고
닫고

- 시집『사슴공원에서』창비, 2012.

하지(夏至)

                        고영민

까치가 짖고
고양이가 올려다보는 저녁이다


고양이는 이내
등뼈의 긴장을 푼다


너무 높다
너에게 가기에는


어린 사과나무엔
푸른 사과들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다
어둠이 오고
사과나무의 까치가 가고
사과의 둘레가 가고
고양이가 사라진다

 
다 추억이다
이렇게 너랑 둘이 마주 앉아서
말을 하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어둠에 묻힌
사과나무의 지붕에서
오금저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 시집 [ 사슴공원에서 ] 창비,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