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 木 ( 설목)
김남조
나의 마음 속
누구도 모르는 산등성에
한 그루 설목을 가꾸어 왔습니다
나뭇잎 지고
시냇물마저 여위는 가을을
최후의 계절이라 믿었던 어느 그 날,
사랑하노라 사랑하노라던 사람
떠나고 없음이여
미워하면서 나를 미워하면서
내 옆에 남아줌이 더욱 백 배는
고맙고 복되었을 것을
물방울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두터운 철물 같은 고요 속에
나뭇가지 사철 고드름 달고
소스라쳐 위로 설악( 雪 岳 )에 뻗는
백엽보다도 희고 손 시린 이 나무는
역력히 이 나무를 닮고
역력히 이 마음을 닮은
내 사랑의 표지입니다
붉은 날인과 같은 회상입니다
당신이여
불씨 한 줌 머금고 죽어도 좋을
이 외로운 겨울밤 겨울밤
-- 오늘 그리고 내일의 노래 ( 김남조 저자.글 ) 시월 출판 2009년2월28일
나무들ㆍ4
김남조
보아라
나무들은 이별의 준비로
더욱 사랑하고만 있어
한 나무 안에서
잎들과 가지들이 혼인하고 있어
언제나 생각에 잠긴 걸 보고
이들이 사랑하는 줄
나는 알았지
오늘은 비를 맞으며
한 주름 큰 눈물에
온몸 차례로 씻기우네
아아 아름다워라
잎이 가지를 사랑하고
가지가 잎을 사랑하는 거
둘이 함께 뿌리를 사랑하는 거
밤이면 밤마다
금줄 뻗치는 별빛을
지하로 지하로
부어 내림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았지
보아라
지순무구, 나무들의 사랑을 보아라
머잖아 잎은 떨어지고
가지는 남게 될 일을
이들은 알고 있어
알고 있는 깊이만큼
사랑하고 있어
- 시집 < 가슴들아 쉬자 > 시인생각, 2012. P 52/53
생명
김남조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에서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날의 섭리에 불려 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 시집 『가난한 이름에게』 미래사, 1991.
- 시집 [ 가슴들아 쉬자 ] 시인생각, 2012. P 98/99
무제 · 2
김남조
그대가 나에게 처음으로
그대에게 내가 처음으로
산자락 개울가 정갈한 외딴집에
새 기름 새 심지로
불 켜고 마주 보는 그들이고저
그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쓰다 헐어진 헌 기름등잔에
알갱이 겨우 남은 성냥으로 불 켜고
남루야 어쨌거나
간절히 마주 앉은 그들이고저
- 시집 [ 가슴들아 쉬자 ] 시인생각, 2012. P 24
겨울나무
김남조
말하려나
말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이 말부터 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이런 말의 산울림도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새하얀 바람 하나
지나갔는데
눈 여자의 치마폭일 거라고
산신령보다 더 오래 사는
그녀 백발의 머릿단일 거라고
이런 말도 하려나
이런 말의 산울림도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어이없이 울게 될
내 영혼 씻어 주는 음악
들려주려나
그 여운 담아둘 쓸쓸한 자연
더 주려나
아홉 하늘 아득하게
산울림 울리려나
울리려나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 시집 한국대표 명시선 100 김남조 < 가슴들아 쉬자 > 시인생각, 2012. P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