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김남조시 모음

려니하하 2024. 1. 15. 22:39

雪 木 ( 설목)



                                김남조


  나의 마음 속
누구도 모르는 산등성에
한 그루 설목을 가꾸어 왔습니다

  나뭇잎 지고
시냇물마저 여위는 가을을
최후의 계절이라 믿었던 어느 그 날,
사랑하노라 사랑하노라던 사람
떠나고 없음이여
미워하면서 나를 미워하면서
내 옆에 남아줌이 더욱 백 배는
고맙고 복되었을 것을

  물방울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두터운 철물 같은 고요 속에
나뭇가지 사철 고드름 달고
소스라쳐 위로 설악( 雪 岳 )에 뻗는
백엽보다도 희고 손 시린 이 나무는
역력히 이 나무를 닮고
역력히 이 마음을 닮은
내 사랑의 표지입니다
붉은 날인과 같은 회상입니다

  당신이여
불씨 한 줌 머금고 죽어도 좋을
이 외로운 겨울밤 겨울밤


-- 오늘 그리고 내일의 노래 ( 김남조 저자.글 ) 시월 출판 2009년2월28일



나무들ㆍ4

                             김남조


보아라
나무들은 이별의 준비로
더욱 사랑하고만 있어
한 나무 안에서
잎들과 가지들이 혼인하고 있어
언제나 생각에 잠긴 걸 보고
이들이 사랑하는 줄
나는 알았지

오늘은 비를 맞으며
한 주름 큰 눈물에
온몸 차례로 씻기우네

아아 아름다워라
잎이 가지를 사랑하고
가지가 잎을 사랑하는 거
둘이 함께 뿌리를 사랑하는 거
밤이면 밤마다
금줄 뻗치는 별빛을
지하로 지하로
부어 내림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았지

보아라
지순무구, 나무들의 사랑을 보아라
머잖아 잎은 떨어지고
가지는 남게 될 일을
이들은 알고 있어
알고 있는 깊이만큼
사랑하고 있어  



- 시집 < 가슴들아 쉬자 > 시인생각, 2012.  P  52/53

생명


                  김남조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벌거벗고 언 땅에 꽂혀 자라는

초록의 겨울보리,

생명의 어머니도 먼 곳에서

추운 몸으로 왔다

 

진실도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온다

버려지고 피흘리면서 온다

 

겨울 나무들을 보라

추위의 면도날로 제 몸을 다듬는다

잎은 떨어져 먼날의 섭리에 불려 가고

줄기는 이렇듯이

충전 부싯돌임을 보라

 

금가고 일그러진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상한 살을 헤집고

입맞출 줄 모르는 이는 친구가 아니다

 

생명은 추운 몸으로 온다

열두 대문 다 지나온 추위로

하얗게 드러눕는

함박눈 눈송이로 온다 

 

- 시집 『가난한 이름에게』  미래사, 1991.

- 시집 [ 가슴들아 쉬자 ] 시인생각, 2012. P 98/99

무제 · 2


                    김남조





그대가 나에게 처음으로

그대에게 내가 처음으로

산자락 개울가 정갈한 외딴집에

새 기름 새 심지로

불 켜고 마주 보는 그들이고저



그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쓰다 헐어진 헌 기름등잔에

알갱이 겨우 남은 성냥으로 불 켜고

남루야 어쨌거나

간절히 마주 앉은 그들이고저



- 시집 [ 가슴들아 쉬자 ] 시인생각, 2012.  P 24

겨울나무


                 김남조




말하려나

말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이 말부터 하려나

겨우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이런 말의 산울림도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새하얀 바람 하나

지나갔는데

눈 여자의 치마폭일 거라고

산신령보다 더 오래 사는

그녀 백발의 머릿단일 거라고

이런 말도 하려나

이런 말의 산울림도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어이없이 울게 될

내 영혼 씻어 주는 음악

들려주려나

그 여운 담아둘 쓸쓸한 자연

더 주려나

아홉 하늘 아득하게

산울림 울리려나



울리려나

울리려나



나의 겨울나무



- 시집 한국대표 명시선 100 김남조 < 가슴들아 쉬자 > 시인생각, 2012. P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