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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시 모음

려니하하 2023. 12. 30. 09:59

세상

      박경리



아이들이 간다
쫑알쫑알 지껄이며 간다
짧은 머리 다풀거리며 간다
일제히 돌아본다
아이들 얼굴은 모두 노인이었다

노인들이 간다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간다
백발,
민들레 씨앗 깃털 같은 머리칼
지팡이 짚고 돌아본다
노인들 눈빛은 갓난아기였다



[우리들의 시간]   마로니에북스,2012.  62쪽


대추와 꿀벌

    
                    박경리




대추를 줍다가

머리

대추에 처박고 죽은

꿀벌 한 마리 보았다

 

단맛에 끌려

파고들다

질식을 했을까

삶과 죽음의

여실如實한 한 자리

 

손바닥에 올려놓은

대추 한 알

꿀벌 반 대추 반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

 

- 시집  [우리들의 시간 ] 마로니에북스, 2012. P 24

불행

                  박경리




사람들이 가고 나면

언제나 신열이 난다

도끼로 장작 패듯

머리통은 빠개지고 갈라진다


사무치게 

사람이 그리운데

순간 순간 눈빛에서 배신을 보고

순간 순간 손끝에서 욕심을 보고

순간 순간 웃음에서 낯설음을 본다


해벽海壁에 부딪쳐 죽은

도요새의 넋이여 그리움이여

나의 불행


- 시집 [ 우리들의 시간 ] 마로니에북스, 2012. P 41

견딜 수 없는 것


                        박경리




단구동에 이사온 후
쐐기에 쏘여
팔이 퉁퉁 부은 적이 있었고
돌 틈의 땡삐,
팔작팔작 나를 뛰게 한 적도 있었고
향나무 속의 말벌 땜에
얼굴 반쪽 엉망이 된 적도 있었고
 
뿐이랴
아카시아 두릅 찔레도
각기 독기毒氣 뿜으며
나를 찔러댔다
 
뿐이랴
베어놓은 대추나무
끌고 가다가
종아리 부딪쳐 피투성이 되던 날
오냐,
너가 나에게 앙갚음을 하는구나
아픔을 그렇게 달래었지만
 
차마 견딜 수 없는 것은
사람의 눈이더군
나보다 못산다 하여
나보다 잘산다 하여
나보다 잘났다 하여
나보다 못났다 하여
 
검이 되고 화살이 되는
그 쾌락의 눈동자
견딜 수가 없었다



- 시집  [ 우리들의 시간 ] 마로니에북스,  2012. P 52/53

차디찬 가슴

  
                      박경리

 


가면들이, 가까이, 멀리서 움직인다

다가오기도 하고 떠나기도 한다

도시의 쓸쓸한 석양

 

가면들도 외로울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외로울까

전봇대에 머리 짓찧지도 못하고

울타리에 매달려 통곡하지도 못하고

소리, 소리 지르며

대로를 누리지도 못하고

 

삶의 방식은 싸늘한 가슴

경쟁의 무기 역시 싸늘한 가슴

오늘은 그것을 자유라 한다 


- 시집 [ 우리들의 시간 ] 마로니에북스, 2012. P 201

해거름

                    ​박경리





베개를 겨드랑 밑에 받치고

팔굽 세워

손바닥에 머리 얹으면

거미줄 늘어진 형광등이 보인다



서편 창문에

잦아드는 밝음

해거름인가 보다

막막함과 분노는 방 안 가득

하마 터질 듯한데



고요하다

종말처럼 고요하다

지구는 참 고요하구나


- 시집 [ 우리들의 시간 ] 마로니에북스, 2012.  P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