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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외 김남조시모음

려니하하 2023. 12. 14. 15:04

편지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 「 김남조 가슴들아 쉬자 」시인생각, 2012.  16쪽


행복

           김남조

행복(幸福)

새와 나,
겨울나무와 나,
저문 날의
만설(滿雪)과 나,
내가 새를 사랑하면
새는 행복할까
나무를 사랑하면
나무는 행복할까
눈은 행복할까

새는 새와 사랑하고
나무는 나무와 사랑하며
눈송이의 오누이도
서로 사랑한다면
정녕 행복하리라

그렇듯이
상한 마음 갈피갈피
속살에 품어주며
그대와 나도 사랑한다면
문득 하느님의 손풍금소리를
들을지 몰라
보석(寶石)의 귀를
가질지 몰라

너를 위하여  


              김남조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祝願)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시집가난한 이름에게(미래사,1991)

겨울 바다_김남조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海風)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혼령(魂靈)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십(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_시집,  《겨울 바다》(1967)

좋은 것_김남조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비통한 이별이나

빼앗긴 보배스러움

사별한 참사람도

그 존재한 사실 소멸할 수 없다



반은 으스름, 반은 햇살 고른

이상한 조명 안에

옛 가족 옛 친구 모두 함께 모였느니



죽은 이와 산 이를

따로이 가르지도 않고

하느님의 책 속

하느님 필적으로 쓰인

가지런히 정겨운 명단 그대로



따스한 잠자리,

고즈넉한 탁상등,

읽다가 접어둔 책과

옛 시절의 달밤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 세상에 솟아난

모든 진심인 건

혼령이 깃들기에 그러하다

_ 《아름다운 시의 정원에서》

박경리 작가님에게 <토지>가 있다면, 김남조 시인님에게는 <막달라 마리아> 연작이 있겠죠. 43년에 걸쳐 쓴 7편의 시...

막달라 마리아 1 / 김남조


당신을 단념했을 때
당신께 대한 더욱 온전한 歸依를
기원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主여

더운 눈물이 줄줄이 돌 속으로 스며들고
마지막 일몰과도 같은 검고 차거운 바람만이
밤새워 불어 오는 이 적요한 무덤에까지
일체의 비교를 넘으신 당신의
슬픔과 죽으심을 섬기러 왔사옵니다
主여

돌의 차거움
당신 墓石의 베히듯 차거움이여
청옥마냥 새파란 하늘 밑에
철쭉꽃 어울려 피듯
당신 뿌리옵신
피며 눈물이며

진실로 하늘과 따의 광영 예서 닫히고
영원한 어둠 속에 인간들 벌받아야
옳음일 것을

당신 누우신 동산에 남아
겨웁도록 빌며 머리 풀고 섰으렵니다

불처럼
참말 불처럼 일던 그 목마르심,
五傷 받고 아직도
우주만치 남던 자비여
오 오 주여

(1955)

막달라 마리아 2 / 김남조


죄와 울음의 여자
일곱 귀신이 몸속에 살아 일곱 가지 귀신굿을 하던 여자
모두 잠들면
이럴 수가 차마 없을
寂寞한 여자

일곱 번의 일곱 갑절
남자를 사랑해
끝내 한사람의 영혼과도 못 만난 여자
어둡고 더 추워서
누구와도 다르던 여자

눈물이며는
눈물에 감아 빚은 머리채며는
잘 비벼 적시는 甘松香油며는
아아 湯藥보다 졸아든 평생의 죄,
모든 참회며는
주님의 발에
간절히 한번만 닿아보게
허락하시올지
神을 사랑한
사람 세상의
여자마음아 여자마음아
천만줄기의 냇물의 지하수의 더 깊은 데에 까지
끓는 단맛의 피로 흘러 흘러서
眞紅의 爆竹
天下 三月의 꽃나무로
凄然히 솟아난다  

(1976)

막달라 마리아 3 / 김남조


나 기도드릴 때면
주의 몸 그림자 안에
일렁이는 빛살무늬로 돋아나는
한 여인을 본다

돌도 사위고 말
이천년의 세월
이천년 줄곧 타는
불화로의 가슴 그 여자
언제 어디서나
주를 따라 맨발로 달려가는
머릿단 길고 검은
유태 여자

당할 수 없어
죄와 통회와
큰 울음인 여자
全靈이 불에 탄 상처 자국인
막달라 마리아만은
도저히 어쩔 수 없어
기 죽어
엎뎌 있는 나여
죄와 통회와 나의 큰 울음은
어느 하늘끝에 뉘일 것인가

(1988)

막달라 마리아 4 / 김남조


당신에게선
손발에 못박는 소리
아슴히 들립니다

사랑하는 분이
눈앞에서 못 박혀
죽으신 후로
당신 몸은 못 박는 소리와
그 메아리들의
소리 祠堂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건
고통입니다
고통의 반복 앞에 서는
율연한 공포입니다
그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舍利를 쌓아
태산을 이룰 때까지
선혈을 탈색하여
증류수의 강으로 넘칠 때까지
천지간 오직 변치 않는 건
죽음과 참사랑뿐

하여 당신에게선
어느 새벽 어느 밤에도
손발에 못박는 아픔
그치지 아니합니다  

(1998)

막달라 마리아 5


당신처럼 저희도
여러 번 남자를 사랑했습니다
당신처럼 저희도
일곱 마귀가 들어
일곱 가지 굿판을 벌입니다

당신은 옥합의 향유를
거룩한 분의 두 발에 따르고
눈물에 적신 머릿단으로
공들여 오래오래 닦았습니다
저희도 그 비슷이는 하였습니다

부활의 아침
날빛보다 밝으신 어른이
이름 부르며 당신 앞에 보이셨기에
비통은 환희로 보답되었습니다
다만 저희는 다릅니다

맨발의 유태 여자
영원한 참회자신 이여
주님은 만만의 구세주 되셨으나
당신은 이천 년 오늘까지
유태의 목마른 우물이며
온세상 여인들의 실못 박힌 마음들을
그 여읜 물거울에 비춥니다

이런 까닭으로
저희는 당신의 제자
당신의 딸 되기를 굳이 청하나이다

(1998)

막달라 마리아 6 / 김남조


모든 이별 중에서
神으로 승천하시는 분과의 이별은
당신뿐입니다
그분의 유산으로
성도들의 순교가 선홍 꽃길로 이어짐도
당신의 경우뿐입니다

사랑이 들키면
죽어야 하는
피비린내의 당신의 시대는
해 저무는 일도 없습니다

결국 당신은
지아비와 아기도 없이
배고픈 이들의 저잣거리에서
일용할 양식과 일용할 희망을 구하는
구걸의 여왕이었지요

하오나
진실로 아뢰오니 여인이여
사랑함으로 절망하고
절망함으로 사랑함을
이천 년 몇 갑절을 되풀이한다 해도
오로지 당신이
구세주의 첫 번째 갈비뼈이나이다
으뜸 至福者시며
영원까지 날빛 폭포이시나이다  

(1998)

막달라 마리아 7 / 김남조


당신도 환생을 하시는지요
한 번은 한국인으로
이 땅에 태어나실는지요

못 사는 부모와 더 못 살게 될
자식들의 나라에
당신의 長技이신
파도 같은 통곡과 참회, 또한 사랑을
울울한 숲으로
자라게 해주실는지요

성서학자들도 누구도
이적지 못 밝혀낸
은총의 秘義를
행복한 전염병으로 퍼뜨려 주실는지요

아아 모처럼
刑場에도 햇빛 부시듯
통한 중에 감격하는
이 경건한 한국의 봄날에
당신은 오실는지요
와서 꼭 그렇게 살아주실는지요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