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만의 위안
조병화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 대며 밀려 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 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 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 날이 오면
잊어버려야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 하루만의 위안 (동문선, 1994)
부끄러움
趙炳華
인생을 다 산 이 끝자락에서
무슨 그리움이 또 남아 있겠는가만
이 외로움은 어디에 끼여 있는
사람의 때이런가
참으로 오래도 살아오면서
모진 그리움, 모진 아쉬움, 모진 기다림, 그 사랑
만남과 헤어짐,
희로애락 겪은 내게
무슨 미진함이 또 있겠는가만
아직도 채 닦아내지 못한 이 외로움은
어디에 남아 있는 사람의 때이런가
때때로, 혹은
시도때도 없이 스며드는 이 외로움
아, 이 끝자락에
이 부끄러움을 어찌하리.
- 시집 [ 남은 세월의 이삭 ] 東文選, 2002. P 45
나의 마지막 꿈은
趙炳華
허공에 아무런 흔적이 없듯
바람이 지나도
구름이 지나도
새가 지나도
낙엽이 펄펄 날리다 사라져도
허공은 그대로 하나 흔적도 없듯
만고의 허공으로 그저 비어 있듯
태풍이 지나도
폭풍우가 지나도
번개 천둥이 지나도
허공은 그대로 하나 흔적도 없듯
만고의 허공으로 그저 비어 있듯
팔십의 세월
인생 희비애락이 지나간 나의 생애
빈 허공으로
그저 아무런 흔적 하나 없이 허공으로 있길
애착도, 욕망도, 미련도, 애욕도, 미움도, 후회도, 아쉬움도,
하나 흔적 없는 빈 허공으로 있길
만고에.
- 시집 [ 남은 세월의 이삭 ] 東文選, 2002. P 97/98
고승과 시인
趙炳華
고승이 절간에서 도를 닦는 일이나
시인이 속세에서 시를 닦는 일이나
끝내는 죽음을 가볍게 통과하려는
그 마음을 닦는 일이려니
죽음을 가볍게 통과하여
허허로운 저 세상에서
허허로운 不在가 되려 함이러니
아, 허허로운 不在가 되어
무한한 소멸로 소멸함이러니
- 시집 [ 남은 세월의 이삭 ] 東文選, 2002. P 44
늘, 혹은
조병화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 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 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네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노을인가.
- 시선집 [ 조병화 시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