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정희성
시만 쓰면 다냐
살림이 기우는데
시만 쓰면 다냐
공자 말씀에 토나 달고 앉아서
술잔에 코를 박고 졸기나 하고
남들이 술값 낼 때
구두끈만 매면 다냐
나라가 꼬이면
말이 어지럽고
말이 헷갈리면
넋도 달아나느니
네 넋은 늬집 개가 물어가서
거렁뱅이 맨발로 떠도느냐
헷갈리지 마라,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은 것은 한국어가 아니다
-정희성시집: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비, 2019)
누가 기뻐서 시를 쓰랴*
정희성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어디 가 조용히
혼자 좀 있다 오고 싶어서
배낭 메고 나서는데 집사람이
어디 가느냐고
생태학교에 간다고
생태는 무슨 생태?
늙은이는 어디 가지도 말고
그냥 들어앉아 있는 게 생태라고
꽃이 마구 피었다 지니까
심란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고
봄이 영영 다시 올 것 같지 않아
그런다고는 못하고
*이상국의 시 「그늘」의 첫 행.
- 시집 [ 그리운 나무 ] 창비, 2013.
바람 부는 날
정희성
송정으로 드라이브를 했다
선생은 차창 너머로 내다보며
바닷물이 정말 짜냐고 그러신다
젊은 시인 하나가 신발 벗고 달려가
숫된 아침 파도 한 움큼을 모셔온다
놀랍지만 누구에게나 신성한 의식 같은
첫 경험이라는 게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며
고운 사람 하나 숨겨두고 싶을 만큼
작고 예쁜 어촌 마을을 더듬어 돌아나온다
일행 중 누군가가 탄식하듯 바람에 눕는
을숙도 갈대숲이 보고 싶단다
생각느니 바람처럼 살아온 나날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새들이 깃들인
아직 처녀인 갈대숲을 눕혀본 일이 없다
- 시집 [ 그리운 나무 ] 창비, 2013.
곰삭은 젓갈 같은
정희성
아리고 쓰린 상처
소금에 절여두고
슬픔 몰래
곰삭은 젓갈 같은
시나 한수 지었으면
짭짤하고 쌉싸름한
황석어나 멸치 젓갈
노여움 몰래
가시도 삭아내린
시나 한수 지었으면
- 시집 [ 그리운 나무 ] 창비, 2013.
시인 본색
정희성
누가 듣기 좋은 말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꽃샘
정희성
봄이 봄다워지기까지
언제고 한번은
이렇게 몸살을 하는가보다
이 나이에 내가 무슨 꽃을 피울까마는
어디서 남몰래 꽃이 피고 있기에
뼈마디가 이렇게 저린 것이냐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