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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시모음

려니하하 2024. 9. 9. 20:31

흰 그림자

               윤동주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든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든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 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든 흰 그림자들,



내 모든것을 돌려 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信念이 깊은 으젓한 양羊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1942.4.14)


​윤동주 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스타북스,2022


자화상自畵像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 追憶  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9)


- 윤동주 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스타북스, 2022    p ㅡ021




달같이

         윤동주



연륜年輪이 자라듯이 
 
달이 자라는 고요한 밤에 
 
달같이 외로운 사랑이 
 
가슴 하나 뻐근히 
 
연륜처럼 피여나간다. 
 
(1939.9)



윤동주 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스타북스,2022

코스모스 

                           윤동주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1938.9.20)



윤동주 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스타북스,2022

내일은 없다
   ㅡ 어린 마음이 물은

                                   윤동주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

(1934.12.24)



윤동주 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스타북스,2022

그 여자女子

          윤동주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가는 손님이 집어 갔습니다.


(1937.7.26)
 


윤동주 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스타북스,2022

초한대



          윤동주



초 한 대ㅡ
내 방에 품ㅡㅡ긴 향내를 맡는다.

ㅡ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心志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暗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1934. 12.24 )


윤동주 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스타북스,2022


편지


윤동주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반딧불

    윤동주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 주으려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을 주으려
숲으로 가자.

삶과 죽음


                        윤동주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하늘 복판에 알 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 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 시집 [ 윤동주 시집 ] 범우사, 1986.  P 64/65


공 상


                         윤동주




공상---

내 마음의 탑

나는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

명예와 허영의 천공에다

무너질 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무한한 나의 공상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을 펼쳐서

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황금 지욕知慾의 수평선을 향하여.



- 시집 [ 윤동주 시집 ] 범우사, 1986. P 125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