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가즈랑집 백석시

려니하하 2024. 9. 8. 21:23

가즈랑집

              백석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 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짐승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오는 집
닭 개 짐승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촌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에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 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아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구릅순 회순 산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몇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 죽는 것만 같아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백석시집"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다실책방 80~81쪽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가즈랑집 → '가즈랑'은 고개 이름. '가즈랑집'은 할머니의 택호를 뜻함.

* 쇠메 → 쇠로 된 메. 묵직한 쇠토막에 구멍을 뚫고 자루를 박음.

* 깽제미 → 꽹과리

* 막써레기 → 거칠게 썬 엽연초

* 구신집 → 무당집

* 구신간시렁 → 걸립(乞粒) 귀신을 모셔놓은 시렁. 집집마다 대청 도리 위 한 구석에 조그마한 널빤지로 선반을 매고 위하였음.

* 당즈깨 → 당세기.  고리버들이나 대오리를 길고 둥글게 결은 작은 고리짝

* 수영 → 수양(收養).  데려다 기른 딸이나 아들

* 아르대즘퍼리 → '아래쪽에 있는 진창으로 된 펄'이라는 뜻의 평안도식 지명

* 제비꼬리 → 회순.  식용 산나물의 이름

* 물구지우림 → 물구지(무릇)의 알뿌리를 물에 담가 쓴 맛을 우려낸 것

* 둥굴레우림 → 둥굴레풀의 어린 잎을 물에 담가 쓴 맛을 우려낸 것

* 광살구 → 너무 익어 저절로 떨어지게 된 살구

* 당세 → 당수.  곡식가루에 술을 쳐서 미음처럼 쑨 음식

* 집오래 → 집의 울 안팎 




수라修羅


                             백석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고독​

                      백석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휘파람 호이 호이 불며
교외로 풀밭길의 이슬을 찬다

문득 옛일이 생각키움은
그 시절이 조아졌음이라
뒷산 솔밭 속의 늙은 무덤 하나
밤마다 우리를 맞아 주었지만 어떠냐!

그때 우리는 단 한 번도
무덤 속에 무엇이 묻혔는가를 알려고 해 본 적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떡갈나무 숲에서 부엉이가 울어도 겁나지 않었다

그 무렵 나는 인생의 제 일과를 즐겁고 행복한 것으로 배웠다.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하늘 높이 단장 홰홰 내두르며
교외 풀밭 길의 이슬을 찬다

그 날 밤 성좌도 곱거니와 개고리 소리 유난유난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경계도 필요없이 금모래 구르는 청류수에 몸을 담갔다.
별안간 뇌성벽력이 울부짖고 번개불이 어둠을 채질했다.
다음 순간 나는 내가 몸에 피를 흘리며 발악했던 것을 깨달엇고
내 주위에서 모든 것이 떠나갔음을 알았다

그때 나는 인생의 제 이과를 슬픔과 고적과 애수를 배웠나니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깃폭인양 옷자락 펄펄 날리며 교외 풀밭 길의 이슬을 찬다

낙사랑의 잣는 실 가늘게 가늘게 풀린다
무엇이 나를 적막의 바다 한가운데로 떠박지른다.
나는 속절없이 부서진 배 쪼각인가?

나는 대고 밀린다 적막의 바다 그 끝으로
나는 바닷가 사장으로 밀려 밀려 나가는 조개 껍질인가?
오! 하늘가에 홀로 팔장끼고 우-뚝 선 저-거무리는 그림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