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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시 모음

려니하하 2024. 8. 8. 23:09

당신에게 묻는다

       허형만


완벽한 사람을 바라지 말라
어차피 애초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다
시도 마찬가지여서
완벽한 시를 바라지 말라
태초에 말씀이 있어
그 말씀이 시로 몸을 바꾸었을 뿐
애초부터 완벽한 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완벽한 시를 갈망하고 있는가
틈새 없는 시는 감동이 없다
시를 쓴다는 일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만큼 힘들다는 사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묻는다
평생 잊지 못할 사람 한 사람쯤 있는지
생의 마지막에 들려줄 눈물겨운 시 한 편 쯤 있는지

허형만 시집 『만났다』, 황금알


그늘이라는 말

허형만

그늘이라는 말
참 듣기 좋다

 그 깊고 아늑함 속에
들은 귀 천년 내려놓고

 푸른 바람으로나
그대 위해 머물고 싶은

 그늘이라는 말
참 듣기 좋다

운주사에서


                   허형만

 

 

운주사에 오면


눕고 싶다


저 와불처럼 나도 누워서


한쪽 팔 턱에 괴고


세상사 지그시, 두 눈 깔고


그만큼만 보거나


아예 몸도 생각도


다 비운 채


허청허청 시린 별로


흐르거나.

 



―시집『영혼의 눈』문학과사상사, 2002.

상실에 대하여


                         허형만




너는 떠났다.
강을 건넜을까 산을 넘었을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 같은
예감을 떨치지 못하지만
아무튼 너는 먼 길을 떠났고
나는 지금 잃어버린
너를 기다리다 머리가 허옇게 쇠었다.
추억은 상자에 담긴 보물이 아니다.
추억이란
물수제비 뜨다가 호수가 꼴깍 삼킨 돌멩이
잃어버리고 찾다가, 찾으려 애쓰다가
마침내 돌아선 곳에 삶이 있다.
너는 떠났다.
호수가 삼킨 돌멩이에 물이끼 돋듯
우리가 있었던 시간은
아무도 추억으로 간직하지 않으리라
그러니 상실에 대하여
상심하지 않기로 한다 나여.



- 시집 [ 만났다 ] 황금알, 2022. P 14

오, 장엄


                    허형만




빗속 풀밭에서

참새 두 마리

보란 듯 대놓고

서로 부리를 부비며

사랑을 나눈다



이때

한참 오던 비도

저 처연한 사랑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 시집 [ 황홀 ] 민음사, 2018.  P 62

숲길에서


                        허형만





명지바람 스치고
땅이 하양 꽃잎들을
온몸으로 융숭히 받고 있어요.


나무초리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햇살에
반짝 빛나는 꽃잎들.


웅숭깊은 땅과 꽃잎들이 한 몸인
지금 이 순간
멧비들기 노래도 멈췄어요.


ㅡ『열린시학』2020, 가을호.

초여름


                        허형만


물냄새
비가  오려나  보다


나뭇잎 쏠리는
그림자


바람결
따라  흔들리고


애기똥풀에  코를 박은
모시나비
지상은
지금 그리움으로  자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