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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시 모음

려니하하 2024. 4. 29. 09:03

참 맑은 물살


곽재구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곽재구, '참 맑은 물살' (창비시선, 57쪽에서)




                    곽재구



내 가슴 속

건너고 싶은 강

하나 있었네

오랜 싸움과 정처없는

사랑의 탄식들을 데불고

인도 물소처럼 첨벙첨벙

그 강 건너고 싶었네

들찔레꽃 향기를 좇아서

작은 나룻배처럼 흐르고 싶었네

흐르다가 세상 밖 어느 숲 모퉁이에

서러운 등불 하나 걸어두고 싶었네.


- 시집 [ 참 맑은 물살 ] 창비, 1995.  P 75




                   곽재구




라일락꽃 향기처럼

아름다운 추억이 늘 내 가슴속에

숨쉴 수 있기를

라일락꽃 향기처럼

아름다운 고통이 늘 내 가슴속에

빛날 수 있기를



해 저무는 날

새 한 마리

내 삶의 여울목에

뜨거운 노래 한 섬 부리고 갑니다.



- 시집 《참 맑은 물살》 창비, 1995.  P 67

배꽃


              곽재구




배꽃들은

황토산 자락에

연분홍 첫사랑의 숨결을 토해놓지



포옹하는 법

입맞춤하는 법

한없이 서툴어도

가슴의 뜨거움 하나로

황토산 자락 억세게 끌어안지



한번 들어봐

무릎 꿇고

귀 깊게 대고

어디서 피가 끓는지

어디서 슬픔의 그늘이 드리우는지

누구의 뼈가 제일 먼저 강을 건너는지



바보 같은 웃음

바보 같은 사랑뿐으로

이 세상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행복한 것인지



어깨 으스러질 듯

못생긴 산과 하늘 부둥켜안으며

배꽃들은

황토산 자락에

연분홍 첫사랑의 숨결을 토해놓지.



- 시집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1999.

좋은 일


                    곽재구

 

익은 꽃이

바람에 날리며

이리저리 세상 주유하는 모습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

 

어린 물고기들이

꽃잎 하나 물고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올라가는 모습

바라보는 것도 좋은 일

 

유모차 안에 잠든 아기

담요 위에 그려진 하얀 구름과 딸기들 곁으로

소월과 지용과 동주와 백석이 찾아와

서로 다른 자장가를 부르려 다투다

아기의 잠을 깨우는 것은 좋은 일

 

눈 뜬 아기가

흩날리는 꽃잎을 잡으려

손가락 열개를 펼치는 것은 좋은 일

아기의 손가락 사이에

하늘의 마을이 있어

 

꽃잎들이 집들의 푸른 창과

지붕에 수북수북 쌓이고

오래전

당신이 쫓다 놓친 신비한 무지개를

꿈인 듯 다시 쫓는 것은 좋은 일



- 시집 < 꽃으로 엮은 방패 > 창비, 2021.  P 34/35


보리피리


                   곽재구




​적벽 가는 길에 보리피리 불었습니다

학교 끝난 아이들 소 몰고

지평선 너머 먼 풀밭으로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지난밤

그대 내게 보랏빛 호미날 하나 주었습니다

헤적일 너무 많은 봄풀들 웃자란 땅은 보여주지 않고

철조망에 찢긴 고라니 한 마리 헐떡이는 땅도 보여주지 않고

사랑하는 이여 빈 손에 호미 한 자루 들고

적벽 가는 황토밭길 끝없이 보리피리 불었습니다.



- 시집『참 맑은 물살』창비, 1995.  P 120

柳京萬里


                     곽재구

 


내게 피할 수 없는

이틀의 시간 주어진다면

하루는 유경 강마을의

소금쟁이 되리

 

긴 발로 소곰소곰 물 위를 스치다

흘러오는 꽃 한송이 만나면

칠십년 서러운 가슴팍 꼭 안아주리

 

남은 하루

소금쟁이 발 아래

반짝이는 윤슬 되리

 

고 조고맣고 귀여운

소금쟁이 발바닥에

소곰소곰 쓰인 시 한줄

밤새 흐르는 달빛에 읽어주리



- 시집 [ 꽃으로 엮은 방패 ] 창비, 2021.  P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