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맑은 물살
곽재구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곽재구, '참 맑은 물살' (창비시선, 57쪽에서)
강
곽재구
내 가슴 속
건너고 싶은 강
하나 있었네
오랜 싸움과 정처없는
사랑의 탄식들을 데불고
인도 물소처럼 첨벙첨벙
그 강 건너고 싶었네
들찔레꽃 향기를 좇아서
작은 나룻배처럼 흐르고 싶었네
흐르다가 세상 밖 어느 숲 모퉁이에
서러운 등불 하나 걸어두고 싶었네.
- 시집 [ 참 맑은 물살 ] 창비, 1995. P 75
새
곽재구
라일락꽃 향기처럼
아름다운 추억이 늘 내 가슴속에
숨쉴 수 있기를
라일락꽃 향기처럼
아름다운 고통이 늘 내 가슴속에
빛날 수 있기를
해 저무는 날
새 한 마리
내 삶의 여울목에
뜨거운 노래 한 섬 부리고 갑니다.
- 시집 《참 맑은 물살》 창비, 1995. P 67
배꽃
곽재구
배꽃들은
황토산 자락에
연분홍 첫사랑의 숨결을 토해놓지
포옹하는 법
입맞춤하는 법
한없이 서툴어도
가슴의 뜨거움 하나로
황토산 자락 억세게 끌어안지
한번 들어봐
무릎 꿇고
귀 깊게 대고
어디서 피가 끓는지
어디서 슬픔의 그늘이 드리우는지
누구의 뼈가 제일 먼저 강을 건너는지
바보 같은 웃음
바보 같은 사랑뿐으로
이 세상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행복한 것인지
어깨 으스러질 듯
못생긴 산과 하늘 부둥켜안으며
배꽃들은
황토산 자락에
연분홍 첫사랑의 숨결을 토해놓지.
- 시집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1999.
좋은 일
곽재구
익은 꽃이
바람에 날리며
이리저리 세상 주유하는 모습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
어린 물고기들이
꽃잎 하나 물고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올라가는 모습
바라보는 것도 좋은 일
유모차 안에 잠든 아기
담요 위에 그려진 하얀 구름과 딸기들 곁으로
소월과 지용과 동주와 백석이 찾아와
서로 다른 자장가를 부르려 다투다
아기의 잠을 깨우는 것은 좋은 일
눈 뜬 아기가
흩날리는 꽃잎을 잡으려
손가락 열개를 펼치는 것은 좋은 일
아기의 손가락 사이에
하늘의 마을이 있어
꽃잎들이 집들의 푸른 창과
지붕에 수북수북 쌓이고
오래전
당신이 쫓다 놓친 신비한 무지개를
꿈인 듯 다시 쫓는 것은 좋은 일
- 시집 < 꽃으로 엮은 방패 > 창비, 2021. P 34/35
보리피리
곽재구
적벽 가는 길에 보리피리 불었습니다
학교 끝난 아이들 소 몰고
지평선 너머 먼 풀밭으로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지난밤
그대 내게 보랏빛 호미날 하나 주었습니다
헤적일 너무 많은 봄풀들 웃자란 땅은 보여주지 않고
철조망에 찢긴 고라니 한 마리 헐떡이는 땅도 보여주지 않고
사랑하는 이여 빈 손에 호미 한 자루 들고
적벽 가는 황토밭길 끝없이 보리피리 불었습니다.
- 시집『참 맑은 물살』창비, 1995. P 120
柳京萬里
곽재구
내게 피할 수 없는
이틀의 시간 주어진다면
하루는 유경 강마을의
소금쟁이 되리
긴 발로 소곰소곰 물 위를 스치다
흘러오는 꽃 한송이 만나면
칠십년 서러운 가슴팍 꼭 안아주리
남은 하루
소금쟁이 발 아래
반짝이는 윤슬 되리
고 조고맣고 귀여운
소금쟁이 발바닥에
소곰소곰 쓰인 시 한줄
밤새 흐르는 달빛에 읽어주리
- 시집 [ 꽃으로 엮은 방패 ] 창비, 2021. P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