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은 행복
이생진
행복이 너무 많아서 겁이 난다
사랑하는 동안
행복이 폭설처럼 쏟아져서 겁이 난다
강둑이 무너지고
물길이 하늘 끝닿은 홍수 속에서도
우리만 햇빛을 얻어 겁이 난다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 것도 없는 너와 난데
사랑하는 동안에는
행복이 너무 많아 겁이 난다
섬으로 가는 자유인
이생진
배 위에서 구두끈을 매는 여인은 아름답다
내가 배를 타고 떠도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배 위에서 배낭을 메고
귀로 파도 소리 들으며
눈으로 먼 섬을 가리키는 여인은 아름답다
그런 낭만은 어디서 배웠을까
학교 선생님이 가르쳐 줬다고 하면 그건 명교사다
빈집 문은 어떻게 잠그고 왔을까
요즘 도둑이 심하다든데
파도 소리에 맞춰
콧노래 부르며 먼 섬으로 가고 있는 여인은 아름답다
여자여서 그럴까 아니 남자라도
그런 남자는 세상을 살 줄 아는 남자다
사람들은 갈 데가 없어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살 줄 몰라서 방황하는 것인데
저렇게 떠돌아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정말 자유를 누릴 만한 사람이다
함께 만세를 부르자고 할까
우리만의 애국가를 부르고 싶다
거문도(작가정신 1998)
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이생진
시 읽는 건 아주 좋아
짧아서 좋아
그 즉시 맛이 나서 좋아
나도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
하고 동정할 수 있어서 좋아
허망해도 좋고
쓸쓸하고 외롭고
춥고 배고파도
그 사람도 배고플 거라는 생각이 나서 좋아
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누가 찾아 올 것 같아서 좋아
시는 가난해서 좋아
시 쓰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해서 좋아
그 사람과 헤어진 뒤에도
시 속에 그 사람이 남아 있어서 좋아
시는 짧아서 좋아
배고파도 읽고 싶어서 좋아
시 속에서 만나자는 약속
시는 외로운 사람과의 약속 같아서 좋아
시를 읽어도 슬프고 외롭고
시를 읽어도 춥고 배고프고
그런데 시를 읽고 있으면
슬픔도 외로움도 다 숨어 버려서 좋아
눈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눈에 파묻힌 집에서 사는 것 같아서 좋아
시는 세월처럼 짧아서 좋아
이생진 시선집
<시, 실컷들 사랑하라>.책과나무. 2023.
조금 남아 있는 햇살
이생진
근린공원
벤치에 걸터앉은 햇살
나의 오늘의 양量과 비슷하다
그 옆에 앉아 햇살 만진다
잠시 후
햇살이 소리 없이 사라진다
나도 벤치에서 일어선다
지금 그런 상황이다
-시집『무연고無緣故』작가정신, 2018. P 117
그건 사리가 아니다
- 목욕탕에서
이생진
여름 한철 목욕탕은 한가하다
이렇게 조용한 절간이 어디 있나 하고
거울 앞에 앉아 독경을 하듯
벌거벗은 나를 읽는다
저 입이 먹어치운 양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아무 실적이 없는 배꼽
그 밑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음모와 고환
비뚤비뚤 걸어온 두 다리
이렇게 나를 발끝까지 읽어가다가
젖은 수건으로 문지른다
사흘 전에도 이렇게 문질렀는데
또 때가 밀린다
먹고 때만 만드는 나의 육신에
목욕탕 유언을 심는다
‘죽어서 사리가 한 사발 나오더라도
놀라지 말고 다 버려라
그건 사리가 아니라 때의 응고다'
- 시집『골뱅이@ 이야기』우리글, 2012.
고별인사를 하듯
이생진
우이천牛耳川 너머로 북한산이 보인다
겨울 눈 덮고 벌렁벌렁 숨을 쉰다
구름이 마른기침을 하며 넘어간다
구름이 무슨 기침을 하나
그저 슬그머니 넘어가지
그랬으면 어떨까 하는 시인이 시 쓰는 버릇이지
수없이 넘고 넘었던 그 산을
이제 넘지 못하고 고별인사를 하듯 손을 흔든다
올봄에 내 눈으로 저 산을 볼 수 있을까
하자
산이 돌아서며 눈물을 흘린다
- 시집 [ 무연고 ] 작가정신, 2018. P 75
무연고
이생진
방학동 뒷산 공동묘지에
이런 현수막이 걸려 있다
'묘지 사용료를 성실히 납부합시다
체납된 묘는 무연고 처리됩니다'
무연고 처리
죽어서 서러운
무연고 처리
무연고 묘비 앞에 앉았기 민망해
내가 슬그머니 일어선다
- 시집 [ 무연고 ] 작가정신, 2018. P 114

이생진 작가는 1929년에 서산에서 태어났다. 1955년 첫 시집 '토끼'를 발표했고 1969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38편, 시선집 3편, 시화집 4편 등을 펴냈으며 1996년 윤동주 문학상, 2002년 상화 시인상을 수상했다.
<무연고>는 2018년 구순을 맞아 내놓은 서른여덟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머리말에서 '90이 되니 인생 풀코스를 뛴 기분이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