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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시 모음

려니하하 2024. 1. 15. 22:43

가정식 백반


                     윤제림




아침 됩니다 한밭식당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낯 검은 사내들,

모자를 벗으니

머리에서 김이 난다

구두를 벗으니

발에서 김이 난다

 

아버지 한 사람이

부엌 쪽에 대고 소리친다,

밥 좀 많이 퍼요. 

 


- 시집 [ 그는 걸어서 온다 ]  문학동네, 2008.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윤제림



강을 건너느라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섰을 때
말없이 앉아 있던 아줌마 하나가
동행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한다
눈 온다
옆자리의 노인이 반쯤 감은 눈으로 앉아 있던 손자를 흔들며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손으로
차창 밖을 가리킨다
눈 온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젊은 남녀가
얼굴을 마주 본다
눈 온다
만화책을 읽고 앉았던 빨간 머리 계집애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든다
눈 온다
한강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이 가끔씩 지상으로 올라서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윤제림시집:그는 걸어서 온다(문학동네, 2011)


산수문경(山水紋鏡)


                           윤제림




자고 일어난 산이 거울을 보네
못물 가득한 논에 엎디어
제 얼굴을 보네
작년 봄 뻐꾸기 울 때 보고 지금 보네.
그새,
당신이 좋아하던 꽃은 지고
내 머리맡에 와 울던 새도 멀리 떠났지,
늙은 굴참나무는 아주 눕고
내 놀던 바위는 저만치 굴러가버렸지,
창식이 삼촌은 죽어서 올라오고
몇 마리 짐승은 길에서 죽었지.
민박집 뒷산이 거울을 보며 우네,
작년 얼굴이 아니네
이 얼굴은 아니네
고개를 흔들며 우네.
장화 한 짝과 막걸리 병과 두꺼비가 보이는
논두렁에서 산이 우네,
식전부터 우네.
건너편 솔숲에서 자고 나온
백로 한 마리가 무심코 논에 들어섰다가
죽은듯이 멈춰 서 있네.
산수문 흐려진 거울 복판에
서 있네.



- 시집 [ 새의 얼굴 ] 문학동네, 2013.

수태고지


                      윤제림





승강기 버튼을 누르면서 아이가 물었다

할아버지 몇 층 가세요?

나는 화를 내며 말했다

나, 할아버지 아니다



아이가 먼저 내리면서 인사를 한다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



"이런 고얀 녀석" 하려는데,

"그래, 안녕" 소리가

먼저 나왔다



잘했다



저 아이가, 내 딸애한테

태기(胎氣)가 있음을 알려주러

먼길을 온 천사인지

누가 아는가        



- 시집 [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 문학동네, 2019.

푸른 꽃


                    윤제림





붉은 꽃 지고 푸른 꽃 핀다



손차양을 하고 해를 향해 마주 서면

아, 뜨거운 이파리들의 눈부신 개선

열흘 싸움에 지친 꽃들이 피 흘리며 떨어져 눕고

상처만큼 푸른 꽃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어선다



이제 보니,

꽃들의 싸움도 참으로

격하구나

장하구나



- 시집 [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 문학동네, 2019.

눈먼 사랑노래


                           윤제림




누가 내게 금붙이 하나 해주시려거든

두 귀에 커다란 귀걸이를 붙여주시게.

동서남북 네 귀에 풍경을 달고 계신

관촉사 미륵님처럼

소리 나는 귀걸이를 달아주시게.

바람 속에 누가 숨어 지나는가 보고도 싶고,

드물겠지만, 나를 위해 부는 바람도 있는가

묻고 싶다네. 더럽고 어두운 내 귀에 대고

문 좀 열어달라며 귓속 시오 리 길을 달려오는

가없는 끝소리의 임자를 찾고 싶다네.

사랑의 고백인 것 같지만 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대체 어디쯤에서 떠오는지 알고 싶다네.

천년의 소식을 듣고도 제자릴 못 뜨는 저 용문산

은행나무처럼, 나를 옴쭉도 못 하게 하는 그 기별이

시방 어디만치 오는가 알고 싶다네.



모르시고들 계셨는가,

여태도 나는 장님이라네.



- 시집 [ 사랑을 놓치다 ] 문학동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