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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시 모음

려니하하 2024. 1. 6. 22:54

끝이 까맣게 탄 새 풀잎

  김용택


  봄을 느껴보고 싶고, 봄을 보고 싶습니다.
  푸른 눈을 틔우는 나뭇가지 끝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고, 나물을 뜯어보고 싶고, 푹신푹신한 좁은 논두렁길을 천천히 걷고 싶고, 논둑 밭둑에 돋아나는 풀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내 뺨에 부는 감미로운 봄바람을 온 몸으로 느껴보고 싶고, 치마폭을 나부끼며 마을을 벗어난 흙 길을 해 질 때까지 걷고 싶고, 양지 바른 언덕에 앉아 해바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시냇물이 흐르는 강가에 버들강아지 부드러운 솜털을 가만히 만져보고 싶고, 마른풀을 태운 강변, 새까만 재 밑에서 돋아나는 끝이 까맣게 탄 풀잎들과 파란 몸을 보고 싶고, 얕은 강물로 나온 잔고기 떼들의 희고 반짝이는 새 몸을 보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들 중에서, 그 모든 것들 중에서
  실은
  당신이
  제일 많이
  보고 싶습니다.

-김용택, '연애시집' (마음산책, 2002)

참 좋은 당신
 

                     김용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좋은
당신
 

- 시집 「참 좋은 당신」시와시학사, 2007.

- 시선집 [ 다시, 사랑하는 시 하나를 갖고 싶다 ] 북로그컴퍼니, 2019. P 14

그리운 꽃편지 5


                         김용택




밖에 찬바람이 붑니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은

당신이 그리워

찬바람 소리 들리는

겨울산에 갑니다

 

겨울 찬바람 속에서도

꽃망울들은 맺혀 꽃소식 기다립니다

오셔요

꽃망울 터뜨릴 꽃바람으로 오셔요

꽃바람으로 저 푸르른 산맥을 넘어

그대가 달려오면

나도 꽃망울 터뜨리며 꽃바람으로

저 푸르른 산맥을 넘어

찬바람 속을 뚫고 달려가겠어요

 

밖엔 찬바람이 붑니다

이렇게 바람 불어 당신이 그리우면

당신을 찾으러

숨찬 겨울산을 몇 개 더 넘습니다

그리운 당신

곧 북상할 꽃소식 꽃바람 따라

당신께 달려가겠어요



- 시집 [ 그리운 꽃편지 ] 문학동네, 1999.

- 시선집 [ 다시, 사랑하는 시 하나를 갖고 싶다 ] 북로그컴퍼니, 2019. P 52/54

빗장  
   

                   김용택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언제 열렸는지
서럽기만 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논둑길을 마구 달려보지만
내달아도 내달아도
속떨림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루종일 시도 때도 없이
곳곳에서 떠올라
비켜 주지 않는 당신 얼굴 때문에
어쩔 줄 모르겠어요.
무얼 잡은 손이 마구 떨리고
시방 당신 생각으로
먼 산이 다가오며 어지럽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당신을 향해 열린
마음을 닫아보려고
찬바람 속으로 나가지만
빗장 걸지 못하고
시린 바람만 가득 안고
돌아옵니다.


- 시집 [ 그대, 거침없는 사랑 ] 푸른숲, 1993.

- 시선집 [ 그 숲에 당신이 왔습니다 ] 태동출판사, 2001.  P 17/18

산 / 김용택

강물을 따라 걸을 때 강물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네
인생은 이렇게 흐르는 거야
너도 나처럼 흘러봐

하얗게 피어 있는 억새 곁을 지날 때 억새는 이렇게 말했네
너도 나처럼 이렇게 흔들려봐
인생은 이렇게 흔들리는 거야

연보라 색 구철초 꽃 곁을 지날 때
구절초 꽃은 이렇게 말했네
인생는 한번 피었다 지는 꽃이야
너도 이렇게 꽃 피어봐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를 지날 때
느티나무는 이렇게 말했네
인생는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그 자리에서 사는 거야
너도 뿌리를 내려봐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밑은 지날 때
구름은 이렇게 말했네
인생는 이렇게 허공을 떠도는 거야
너도 그렇게 정처 없이 떠볼아봐

내 평생 산 곁을 지나다녔네
산은 말이 없었네
산은,
지금까지 한마디 말이 없었네

섬진강1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 가도 퍼 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 꽃,

숯불 같은 자운영 꽃 머리에 이어 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 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시집  [ 섬진강 ] 창비, 2007.

- 애송시 100편 시선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 ] 민음사, 2008. P 146/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