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이근배시 모음

려니하하 2023. 12. 30. 07:25

살다가 보면



                           이근배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떠나보내고
어둠 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 <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  
(문학세계사, 2004)

절필絶筆

    
                     이근배




아직 밖은 매운바람일 때
하늘의 창을 열고
흰 불꽃을 터뜨리는
목력의 한 획,
또는
봄밤을 밝혀 지새우고는
그 쏟아낸 혈흔血痕을 지워가는
벚꽃의 산화散花,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단풍으로 알몸을 태우는
설악雪嶽의 물소리,
오오 꺾어봤으면
그것들처럼 한번
짐승스럽게 꺾어봤으면
이 무딘 사랑의
붓대.


- 시집 [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 문학세계사, 2004. P 11

찔레


                    이근배




창호지 문에 달 비치듯

환히 비친다 네 속살꺼정

검은 머리칼 두 눈

꼭두서니 물든 두 뺨

지금도 보인다 낱낱이 보인다

사랑 눈 하나 못 뜨고 헛되이 흘려버린 불혹

거짓으로만 산 이 부끄러움

네게 던지마 피 걸레에 싸서

희디흰 입맞춤으로 주마

내 어찌 잊었겠느냐

가시덤불에  펼쳐진 알몸

사금파리에 찔리며 너를 꺾던

새순 돋는 가시 껍질 째 씹던

나의 달디단 전율을

스무 해전쯤의 헛구역질을



- 시집  [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 문학세계사, 2004. P 79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 수국에 와서

                         이근배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에

바다를 가두고 사는 까닭을 안다

바람이 불면 파도로 일어서고

비가 내리면 맨살로 젖는 바다

때로 울고 때로 소리치며

때로 잠들고 때로 꿈꾸는 바다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하나씩 섬을 키우며

사는 까닭을 안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잎이 지고 눈이 내리는 섬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별빛을 닦아 창에 내걸고

안개와 어둠 속에서도

홀로 반짝이고

홀로 깨어 있는 섬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꿈의 둥지를 틀고

노래를 물어 나르는 새

새가 되어 어느 날 문득

잠들지 않는 섬에 이르러

풀꽃으로 날개를 접고

내리는 까닭을 안다.


- 시집 [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 문학세계사, P 112/113

연가(戀歌)


                      이근배




바다를 아는 이에게

바다를 주고

산을 아는 이에게

산을 모두 주는

사랑의 끝끝에 서서

나를 마저 주고 싶다.

나무면 나무 돌이면 돌

풀이면 풀

내 마음 가 닿으면

괜한 슬픔이 일어

어느새 나를 비우고

그것들과 살고 있다.



-시집 [ 살다가 보면 ] 시인생각,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