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보면
이근배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떠나보내고
어둠 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 <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
(문학세계사, 2004)
절필絶筆
이근배
아직 밖은 매운바람일 때
하늘의 창을 열고
흰 불꽃을 터뜨리는
목력의 한 획,
또는
봄밤을 밝혀 지새우고는
그 쏟아낸 혈흔血痕을 지워가는
벚꽃의 산화散花,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단풍으로 알몸을 태우는
설악雪嶽의 물소리,
오오 꺾어봤으면
그것들처럼 한번
짐승스럽게 꺾어봤으면
이 무딘 사랑의
붓대.
- 시집 [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 문학세계사, 2004. P 11
찔레
이근배
창호지 문에 달 비치듯
환히 비친다 네 속살꺼정
검은 머리칼 두 눈
꼭두서니 물든 두 뺨
지금도 보인다 낱낱이 보인다
사랑 눈 하나 못 뜨고 헛되이 흘려버린 불혹
거짓으로만 산 이 부끄러움
네게 던지마 피 걸레에 싸서
희디흰 입맞춤으로 주마
내 어찌 잊었겠느냐
가시덤불에 펼쳐진 알몸
사금파리에 찔리며 너를 꺾던
새순 돋는 가시 껍질 째 씹던
나의 달디단 전율을
스무 해전쯤의 헛구역질을
- 시집 [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 문학세계사, 2004. P 79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 수국에 와서
이근배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에
바다를 가두고 사는 까닭을 안다
바람이 불면 파도로 일어서고
비가 내리면 맨살로 젖는 바다
때로 울고 때로 소리치며
때로 잠들고 때로 꿈꾸는 바다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하나씩 섬을 키우며
사는 까닭을 안다
사시사철 꽃이 피고
잎이 지고 눈이 내리는 섬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별빛을 닦아 창에 내걸고
안개와 어둠 속에서도
홀로 반짝이고
홀로 깨어 있는 섬
여기 와 보면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꿈의 둥지를 틀고
노래를 물어 나르는 새
새가 되어 어느 날 문득
잠들지 않는 섬에 이르러
풀꽃으로 날개를 접고
내리는 까닭을 안다.
- 시집 [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 문학세계사, P 112/113
연가(戀歌)
이근배
바다를 아는 이에게
바다를 주고
산을 아는 이에게
산을 모두 주는
사랑의 끝끝에 서서
나를 마저 주고 싶다.
나무면 나무 돌이면 돌
풀이면 풀
내 마음 가 닿으면
괜한 슬픔이 일어
어느새 나를 비우고
그것들과 살고 있다.
-시집 [ 살다가 보면 ] 시인생각,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