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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꽃 문정희

려니하하 2023. 11. 27. 13:31

성에꽃
          문정희

추위가 칼날처럼 다가든 새벽
무심히 커튼을 젖히다 보면
유리창에 피어난, 아니 이런 황홀한 꿈을 보았나

세상과 나 사이에 밤새 누가
이런 투명한 꽃을 피워 놓으셨을까

들녘의 꽃들조차 제 빛깔을 감추고
씨앗 속에 깊이 숨 죽이고 있을 때
이내 스러지는 니르바나의 꽃을

저 얇고 날카로운 유리창에 누가 새겨 놓았을까

하긴 사람도 그렇지
가장 가혹한 고통의 밤이 끝난 자리에
가장 눈부시고 부드러운 꿈이 일어서지

새하얀 신부 앞에 붉고 푸른 색깔들 입 다물듯이
들녘의 꽃들 모두 제 향기를
씨앗 속에 깊이 감추고 있을 때

어둠이 스며드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누가 저토록 슬픈 향기를 새기셨을까.

한 방울 물로 스러지는
불가해한 비애의 꽃송이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