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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려니하하 2023. 4. 15. 19:18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이기철

  내 몸은 낡은 의자처럼 주저앉아
  기다렸다
  병은 연인처럼 와서 적처럼  깃든다
  그리움에 발 담그면 병이 된다는 것을
  일찍 안 사람은 현명하다
  나, 아직도 사람 그리운 병 낫지 않아
  낯선 골목 헤맬 때
  등신아 등신아 어깨 때리는
  바람소리  귓가에 들린다
  별 돋아도 가슴 뛰지 않을 때까지
  살 수 있을까
  꽃잎 지고 나서 옷깃에 매달아 둘
  이름 하나 있다면
  아픈 날들 지나 아프지 않은 날로 가자
  없던 풀들이 새로 돋고
  안보이던 꽃들이 세상을 채운다
  아, 나는 생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삶보다는 훨씬 푸르고 생생한 생
  그러나 지상의 모든 것은 한번은
  생을 떠난다
  저 지붕들, 얼마나 하늘로
  올라가고 싶었을까
  이 흙먼지 밟고 짐승들, 병아리들
  다 떠날 때까지
  병을 사랑하자, 병이 생이다
  그 병조차 떠나고 나면, 우리
  무엇으로 밥 먹고 무엇으로
  그리워할 수 있느냐

(노래마다 눈물이 묻어 있다)
시인생각 2013-이기철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