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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조시 모음

려니하하 2023. 4. 8. 08:58

오래된 안경점 앞
                                          김부조
 
신사역 8번 출구
오래된 안경점 앞
 
걸음마 뗀 펭귄처럼
멀뚱히 서서
오지 않을 그대를 기다립니다
 
만나야 할 사람은
발자국 없이도 온다지만
나의 마음 여린 곳
어느 한 철
바람 잘 날 없어,
이젠 그대의 그림자를
버릴 때도  되었으나
나는 이미 기다림의 유혹에
한 뼘씩 허물어져 내려
시린 몸을 내어 줍니다
 
이제 막 기다림을 배운 사람들과
기다림을 뼛속 깊이 묻은 사람들이
얼룩진 나의 그림자를
나누어 딛고 서는 곳
 
신사역 8번 출구
오래된 안경점 앞
 
오늘도 그대는 오지 않았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다림뿐이었습니다
 


김부조 제2시집, 《어머니의 뒷모습》

어떤 안부

                  김부조

세상과 삐걱이다
끝내 낙향한 친구가
감자 한 자루를 보내왔다

꼭꼭 동여맨 매듭을
화해하듯 풀어내자
크고 작은 감자들이
다투듯 쏟아져 나왔다

저마다의 굵기처럼
고르지 못했을 귀농의 나날,
자잘한 멍 자국이 선명하다

친구가 보내 온
감자 한 자루를 풀어내며
불화에 대하여 생각했다

내가 이 세상과 누려온,
낯 뜨거운 타협도 생각했다

[조용한 질서]김부조 제4시집

관조(觀照) / 김부조



산란(散亂)에 물든 세상이

숨겨진 질서였음을



뜨거웠던 너와의 불화가

넘치는 사랑이었음을



아물지 않는 나의 상처가

삶의 선물이었음을​​

곡선에 물들다



김부조





강물이 때때로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것은

결코 휘어짐이 아니다



강물은 풍문으로 떠도는

그 강 끝의 비밀을 가리기 위해

곡선의 묘미를 넌지시

곁눈질할 따름이다



강물이 때때로

굽이진 노래를 부르는 것은

결코 무너짐이 아니다



강물은 비켜설 수 없는

올곧음과의 상생을 위해

곡선의 멋을 슬며시

흉내 낼 따름이다



인생의 길은

그 끝이 가려진 곡선



내가 기꺼이

둘러서 가는 것은

그 곡선에 물들기 위함이다


살아가는 동안  

                      김부조

 
살아가는 동안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살아가는 동안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고된 만남이 아니어도 좋다
화려한 만남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무심한 바람처럼
가볍게 스쳐만 가도
그 닿음에 전율하리
그 흔적에 입맞추리
 
살아가는 동안
지울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살아가는 동안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시집  지구문학,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