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안경점 앞
김부조
신사역 8번 출구
오래된 안경점 앞
걸음마 뗀 펭귄처럼
멀뚱히 서서
오지 않을 그대를 기다립니다
만나야 할 사람은
발자국 없이도 온다지만
나의 마음 여린 곳
어느 한 철
바람 잘 날 없어,
이젠 그대의 그림자를
버릴 때도 되었으나
나는 이미 기다림의 유혹에
한 뼘씩 허물어져 내려
시린 몸을 내어 줍니다
이제 막 기다림을 배운 사람들과
기다림을 뼛속 깊이 묻은 사람들이
얼룩진 나의 그림자를
나누어 딛고 서는 곳
신사역 8번 출구
오래된 안경점 앞
오늘도 그대는 오지 않았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다림뿐이었습니다
김부조 제2시집, 《어머니의 뒷모습》

어떤 안부
김부조
세상과 삐걱이다
끝내 낙향한 친구가
감자 한 자루를 보내왔다
꼭꼭 동여맨 매듭을
화해하듯 풀어내자
크고 작은 감자들이
다투듯 쏟아져 나왔다
저마다의 굵기처럼
고르지 못했을 귀농의 나날,
자잘한 멍 자국이 선명하다
친구가 보내 온
감자 한 자루를 풀어내며
불화에 대하여 생각했다
내가 이 세상과 누려온,
낯 뜨거운 타협도 생각했다
[조용한 질서]김부조 제4시집
관조(觀照) / 김부조
산란(散亂)에 물든 세상이
숨겨진 질서였음을
뜨거웠던 너와의 불화가
넘치는 사랑이었음을
아물지 않는 나의 상처가
삶의 선물이었음을
곡선에 물들다
김부조
강물이 때때로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것은
결코 휘어짐이 아니다
강물은 풍문으로 떠도는
그 강 끝의 비밀을 가리기 위해
곡선의 묘미를 넌지시
곁눈질할 따름이다
강물이 때때로
굽이진 노래를 부르는 것은
결코 무너짐이 아니다
강물은 비켜설 수 없는
올곧음과의 상생을 위해
곡선의 멋을 슬며시
흉내 낼 따름이다
인생의 길은
그 끝이 가려진 곡선
내가 기꺼이
둘러서 가는 것은
그 곡선에 물들기 위함이다

살아가는 동안
김부조
살아가는 동안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살아가는 동안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고된 만남이 아니어도 좋다
화려한 만남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무심한 바람처럼
가볍게 스쳐만 가도
그 닿음에 전율하리
그 흔적에 입맞추리
살아가는 동안
지울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살아가는 동안
버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시집 지구문학,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