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한용운시 모음

려니하하 2023. 4. 6. 09:24

꽃싸움

                           한용운​

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에 ‘꽃이 피거든 꽃싸움하자’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나는 한 손에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한 손에 흰 꽃수염을 가지고 꽃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은 당신이라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이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번번이 이긴 나는 당신에게 우승의 상을 달라고 조르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방긋이 웃으며, 나의 뺨에 입맞추겠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한용운, 1926,《님의침묵》

나는 잊고자
                      한용운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지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

잊든지 생각하든지 내버려 두어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 시선집 [ 님의 침묵 ] 와이 앤 엠, 2020. P 19/20

꽃이 먼저 알아
                         한용운

옛집을 떠나서 다른 시골에 봄을 만났습니다.

꿈은 이따금 봄바람을 따라서 아득한 옛터에 이릅니다.

 지팡이는 푸르고 푸른 풀빛에 묻혀서 그림자와 서로 따릅니다.

 

길가에서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고서 행여 근심을 잊을까 하고 앉았습니다.

꽃송이에는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아니한가 하였더니

아아, 나의 눈물이 떨어진 줄이야 꽃이 먼저 알았습니다.

- 시선집 [ 님의 침묵 ] 와이 앤 엠, 2020. P 71

해당화 
                         한용운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 시선집 [ 님의 침묵 ] 와이 앤 엠, 2020. P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