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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잎,잎 이기철시집에서

려니하하 2023. 2. 27. 10:47

잎, 잎, 잎
              이기철


우리 부르는 이름 가운데가장 보드라운 이름은 몇 켤레나 될까요
풀잎이 백 켤레의 신발을 신고 건너간 풀밭에는 하나의 발자국도 찍혀 있지 않습니다
옷 갈아입지 않은 데도 늘 새옷인 잎들이 또 다림질한 하루를 당겨옵니다    
너무 깨끗한 몸들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어 그 해의 가장 아름다운 아침이 열립니다
누군가가 잎이라 불렀기에 나도 그를 따라 잎이라 부릅니다
부르다 보면 어느덧 내 몸이 풀잎이 됩니다
함께 가자 말 안했는데 또 하루를 데려다 놓고 풀잎은 풀잎대로 길 떠나고 돌아 옵니다
풀잎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풀잎
잎새는 잎새끼리 모여서 삽니다
잎,잎,잎, 그들의 살 닿음이 천국인 이유입니다


시집《 잎 ,잎, 잎》 서정시학,2011

우리 어린 그리움에겐 무얼 선물해야 하나

                                                                    이기철



그리움은 연두가 초록으로 가는 길목 같아서
실낱같이 와서 실낱같이 가는 발자국 소리 같아서
보고 싶음은 누가 낮게 울고 간 흔적 같아서
그럴 적 내 눈시울도 조금은 젖어서

우리 어린 그리움에겐 무슨 선물을 해야 하나
조금만 세게 집어도 터지고 마는
앵두 딸기 오디를 접시에 담아주고 싶어서
동화책 들고 와 제 혼자 읽다 가는
봄비 몇 송이 우엉 잎에 싸 주고 싶어서

보고 싶음은 혼자이고
그리움은 여럿이어서
지금은 상추 잎 씻어 어린 그리움과
오순도순 밥 먹고 싶어서

시집《 잎, 잎, 잎》  p24

시집 놓인 책상

                       이기철


책을 열면 오래 참은 음악이 뛰어나온다

다리의 솜털에 꿀을 묻힌 벌들이 음계를 물고 날아간다

멀리서 쫒아온 햇빛이 창문을 급히 두드린다

시집 놓인 책상에는

빨간 리본으로 묶은 생일선물 같은 글이 있다

글의 가슴이 다 만져진다

측백나무 숲으로 새똥 묻은 아침이 온다

잠자던 영혼이 햇빛을 받아 깨어난다

페이지를 넘기는 가슴이 뛴다


시집 《잎, 잎, 잎》 p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