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간다는 말
이재무
나는 돌아가는 중
어제도 그제도 돌아가는 데 열중했다
태어나서 내가 한 일은 돌아가는 일
왔으니 돌아가는 것
돌아가는 길목에 벗과 의인
강도와 도둑 그리고 천사를 만났지만
나그네는 길에서 쉴 수가 없다
돌아가서 나는 말하리라
괴롭고 슬픈 일이 있었지만
약 같은 위로와 뜻밖의 사랑과
기쁨으로 걷는 수고를 덜 수 있었노라
나는 돌아가는 중
시간의 가파른 계곡을 타고
푸른 별, 숨 탄 곳
돌아가 나는 마침내 나를 벗으리라
-이재무시집:즐거운소란(천년의시작, 2022)
병
이재무
나이 드니 잔병들 생겨나기 시작한다
잔병 늘어날수록 죄짓는 일 줄어드니
어찌 낙망할 수 있으랴
죄악은 때로 지나친 건강에서 비롯되기도 하느니
오만방자했던 생이여!
찾아오는 병을 환대하여라
병은 내 안의 정서들 사이의 전쟁
나를 서서히 해방시킨다*
병처럼 큰 스승이 어디 있으랴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인용
시집 「즐거운 소란」
사랑
이재무
낮에도 별은 반짝이고
낮에도 별똥별은 떨어지고
낮에도 달은 떠 흐르는데
어둠을 바탕으로 피는 것들을
낮에는 볼 수 없다네
사랑도 이와 같아서
너랑 나랑
한낮을 살 때는 뵈지 않다가
네가 지고 홀로 깜깜해지면
네가 내 생을 반짝였거나
내가 네 생을 흘렀다는 걸
뒤늦게 회한처럼 알게 된다네
건들건들
이재무
꽃한테 농이나 걸며 살면 어떤가
움켜쥔 것 놓아야 새것 잡을 수 있지
빈손이라야 건들건들 놀 수 있지
암팡지고 꾀바르게 사느라
웃음 배웅한 뒤 그늘 깊어진 얼굴들아,
경전 따위 율법 따위 침이나 뱉어주고
가볍고 시원하게 간들간들 근들근들
영혼 곳간에 쟁인 시간의 낱알
한 톨 두 톨 빼먹으며 살면 어떤가
해종일 가지나 희롱하는 바람같이
우는 사람
이재무
마음의 우물이 말라 버렸다
구름이 흐르고 바람이 불고
별이 반짝이고
달빛 환하던 우물
마른자리 바닥에는
미움의 잡동사니 수북이 쌓여 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까닭 없이
설레던 얼굴들 뵈지 않고
사소한 오해로 아득히 멀어졌구나
마음의 우물 말라 버린 뒤
누구도 간절히 그립지 않고
숭숭 구멍 뚫린 문풍지
저 혼자 우는 사람 되었다
- 시집 [ 즐거운 소란 ] 천년의시작, 2022. P 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