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시 모음
진리
함석헌
진리는 슬퍼,
파랗게 슬퍼.
분주한 일 다 마치고
떠들던 손님 다 보내고
사람이 다 자고
새도 자고 쥐도 죽은 밤
티끌이 다 가라앉고
구름 다 달아나고
높이 드러나는 파란하늘
깜박깜박하는 파란 별
아슬하게 올려다볼 때 같이,
진리의 얼굴 마주 대하면
파랗게 슬퍼.
진리는 슬퍼,
파랗게 슬퍼.
엉클어진 넝쿨 다 헤치고
우는 시냇물 그대로 남겨두고
험한 골짜기를 건너
위태로운 바위를 더듬어
무르익은 산과를 내버리고
어지러이 피는 꽃밭도 뒤에 두고
나무도 없고 풀도 없는 높은 봉에
하늘 쓰고 돌 위에 앉아
포구의 그림자도 없이
망망하게 열린 파아란 바다
끝없이 일고 꺼지는 파란 물결
아득하게 바라볼 때 같이,
진리의 눈동자 건너다보면
파랗게 슬퍼
- 저작시집 [ 수평선 너머 ] 한길사, 2009.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1901~1989)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수평선 너머 (한길사, 1976)

할미꽃
함석헌
얼음도 아니 녹아 피는 향기 갸륵커늘
고개 숙고 털옷 입어 숨기잠 웬 뜻인고
깊은 속 붉은 맘 찾는 임만 볼까 함이네.
가뜩이 덧없는 봄 채 오지 못한 적에
잠시 영화 안 누리고 질러감 웬일인고
동풍에 백발이 날아 더욱 눈물겹고나
얼음과 싸우던 뜻 아는 이 하나 없고
덧없는 한때 영화 다투는 꼴 가엾어서
흰 머리 풀어 흔들고 허허 웃는 노장부
백화요란(百花繚亂) 계집년들 봄꿈 깰 줄 모르건만
서리 치는 가을 심판 어이 멀다 할 것이냐
막대로 하늘 가리켜 부르짖는 예언자
동풍 비에 머리 푸는 즐풍목우(櫛風沐雨) 저 사내야
세상이 너 모른다 슬피 한숨 짓는 거냐
온 세상 다 모른대도 눈물질 난 아니여
- 저작시집 [ 수평선 너머 ] 한길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