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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관한 시모음

려니하하 2023. 12. 31. 15:55

폭설


                                  이재무


하느님도 가끔은 어지간히 심심하셔서 장난기
가 발동하시나 보다. 지상에 하얀 도화지 한 장
크게 펼쳐놓으시고서 인간들을 붓 삼아 여기저
기 괴발개발 낙서를 갈기시는 걸 보면. 그리고
는 당신이 보시기에도 그 낙서들 너무 심란하고
어지러우면 한 사흘 뒤 햇살이나 비 지우개로
박박 문질러 말끔하게 지우시는 걸 보면.

- 슬픔은 어깨로 운다 (천년의시작, 2017)

유빙들

 
                     이재무
 



어긋난 사랑 엇도는 관계를 저렇게도

 
아프고 무력하게 말하는 것들이 있다

 
한파가 맺어준 단단한 결속을 저렇게도

 
한순간에 허무는 것들이 있다

 
둥둥 물살에 휩쓸려 떠다니면서

 
한 몸으로 살았던 어제를 잊고

 
서로를 불신하며 밀어내고 있는 것들이 있다

 
쩌렁쩌렁 겨울 천하를 호령하던 이력 지우고

 
흐르는 세월에 재빠르게 순응하는 것들이 있다

 

- 시선집 < 얼굴 > 천년의시작, 2018. P 193



폭설 / 장석남

밤사이 폭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가 찢어지는 소리
폭설이 끊임없이 아무 소리 없이 피가 새듯 내려서 오래 묵은 소나무 가지가 찢어져 꺾이는 소리, 비명을 치며
꺾이는 소리, 한도 없이 부드러웁게 어둠 한 켠을 갉으며 눈은 내려서 시내도 집도 인정도 가리지 않고 비닐하우스도 폭도도 바다도 길도 가리지 않고 아주 조그만 눈송이들이 내려서 소나무 가지에도 앉아
부드러움이 저렇게 무겁게 쌓여서
부드러움이 저렇게 천근 만근이 되어
소나무 가지를 으깨듯 찢는 소리를
무엇이든 한번쯤 견디어 본 사람이라면 미간에 골이 질,
창자를 휘돌아치는
저 소리를
내 생애의 골짜기마다에는 두어야겠다

사랑이 저렇듯 깊어서, 깊고 깊어서
우리를 찢어놓는 것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사랑이 소리도 없이 깊어서
나와 이웃과 나라가 모두, 인류가
사랑 아래 덮인다
하나씩 하나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켜씩
한 자씩 두 자씩 쌓여서
더 이상 휠 수 없고 더 이상 내려놓을 수 없고 버틸 수 없어서 꺾어질 때, 찢어질 때, 부러지고 으깨어질 때 그 비명을 우리는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부르자

사랑에 찢기기 전에 꿈꾸고
사람에 찢기기 전에 꿈으로 달려가고
찢기기 전에 숨는 굴뚝새가 되어서
속삭임들을 듣는다
이 사랑의 방법을 나는 이제야 눈치 채고
이제야 혼자 웃는다

눈은 무릎을, 허리를 차오르고 있다
눈은 가슴께에 차오른다
한없이 눈은, 소리도 없이 눈은
겨울보다도 더 많이 내려 쌓인다
오, 사랑이란
저러한 大寂의 이력서다

- 장석남,『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 2005)

 눈 내리는 마을


                      오탁번




건넛마을 다듬이 소리가
눈발 사이로 다듬다듬 들려오면
보리밭의 보리는
봄을 꿈꾸고
시렁 위의 씨옥수수도
새앙쥐 같은 아이들도
잠이 든다


꿈나라의 마을에도
눈이 내리고
밤마실 나온 호랑이가
다디단 곶감이 겁이 나서
어흥어흥 헛기침을 하면
눈사람의 한쪽 수염이
툭 떨어져서 숯이 된다


밤새 내린 눈에
고샅길이 막히면
은하수 물빛 어린 까치들이
아침 소식을 전해 주고
다음 빙하기가 만년이나 남은
눈 내리는 마을의 하양 지붕이
먼 은하수까지 비친다



- 시집 : 한국대표 명시선 100  오탁번  < 눈 내리는 마을 > 시인생각, 2013. P 32/33


    -함박눈

                       목필균



아침에 눈을뜨니

세상은 온통 은빛 속에 있습니다



깃털로 내려앉은 하얀 세상

먼 하늘 전설을 물고

하염없이 내립니다



오늘 같은 날에는

같은 기억을 간직한 사람과

따끈한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다면

예쁜 추억 다 꺼내질 것 같습니다



하얀 눈 속에 돋아난 기억 위로

다시 길을 내며 나눌 이야기들



오늘 같은 날에는

가슴으로 녹아드는 눈 맞으며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 시집 < 내게 말 걸어 주는 사람들 > 시선사, 2021. P 90

폭설, 그 이튿날


                         안도현



눈이 와서,

대숲은 모처럼 누웠다



대숲은 아주 천천히

눈이 깔아놓은 구들장 속으로 허리를 들이밀었을 것이다



아침 해가 떠올라도 자는 척,

게으른 척,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은



밤새 발이 곱은 참새들

발가락에 얼음이 다 풀리지 않았기 때문



참새들이 재재거리며 대숲을 다 빠져나간 뒤에

대숲은 눈을 툭툭 털고

일순간, 벌떡 일어날 것이다



- 시집『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현대문학북스, 2001.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었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었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