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정호승시 모음

려니하하 2023. 12. 31. 15:51

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숯이 되라

                   정호승

상처 많은 나무의 가지가 되지 말고
새들이 날아와 앉는 나무의 심장이 되라
내가 끝끝내 배반의 나무를 불태울지라도
과거를 선택한 분노의 불이 되지 말고
다 타고 남은 현재의 고요한 숯이 되라

숯은 밤하늘 별들이 새들과 함께
나무의 가슴에 잠시 앉았다 간 작은 발자국
밤새도록 새들이 흘린 눈물의 검은 이슬
오늘밤에도 별들이 숯이 되기 위하여
이슬의 몸으로 내 가슴에 떨어진다

미래는 복수에 있지 않고 용서에 있으므로
가슴에 활활 격노의 산불이 타올라도
산불이 지나간 자리마다 잿더미가 되어
잿더미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아
화해하는 숯의 심장이 되라
용서의 불씨를 품은 참숯이 되라

창비, 2020

빈 그릇이 되기 위하여


                            정호승




빈 그릇이 빈 그릇으로만 있으면 빈 그릇이 아니다

채우고 비웠다가 다시 채우고 비워야 빈 그릇이다

빈 그릇이 늘 빈그릇으로만 있는 것은

겸손도 아름다움도 거룩함도 아니다

빈 그릇이 빈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채울 줄 알아야 한다

바람이든 구름이든 밥이든 먼저 채워야 한다

채워진 것을 남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비워져

푸른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채울 줄 모르면 빈 그릇이 아니다

채울 줄 모르는 빈 그릇은 비울 줄도 모른다

당신이 내게 늘 빈 그릇이 되라고 하시는 것은

먼저 내 빈 그릇을 채워 남을 배고프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채워야 비울 수 있고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으므로

채운 것이 없으면 다시 빈 그릇이 될 수 없으므로

늘 빈 그릇으로만 있는 빈 그릇은 빈 그릇이 아니므로

나는 요즘 추운 골목 밖에 나가 내가 채워지기를 기다린다



- 시선집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김영사, 2021.  P 394

출 가​


                     정호승




폭설이 내린 겨울 들판

불국사 석가탑 같은 송전탑에

작은 새 한마리

어디선가 고요히 날아와 앉자

송전탑이 새가 되어 적막한 날개를 펼친다

바람이 불고

다시 폭설이 내리고

송전탑에 앉은 새가 말없이 폭설을 뚫고 날아가자

송전탑도 그만 새가 되어 날아간다

그대 멀리

어느 눈 내리는 산사로 출가하는가




- 시집 < 당신을 찾아서 > 창비, 2020.   P 21

택배

      정호승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

누가 보낸 슬픔의 제품이길래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길래

사랑을 잃고 두 눈이 멀어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나에게 배송돼 왔나

포장된 슬픔은 나를 슬프게 한다

살아갈 날보다 죽어갈 날이 더 많은 나에게

택배로 온 슬픔이여

슬픔의 포장지를 스스로 벗고

인생에 단 한번이라도 나에게만은

슬픔의 진실된 얼굴을 보여다오

마지막 한 방울 눈물이 남을 때까지

얼어붙은 슬픔을 택배로 보내고

누가 저 눈길 위에서 울고 있는지

그를 찾아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창비, 2022)

타종(打鐘)

​               정호승



내 가슴에 종각이 한 채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종도 없이 텅 빈 종각이 세워져

집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

소주를 마시며 비를 피하곤 하더니

어느 날 보신각종 같은 종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나는 내 가슴의 종소리를 듣고 싶었다

종소리에 내 눈물을 실어

멀리 수평선 너머로 보내고 싶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를 찾아와 종을 치는 사람은 없었다

석가모니와 예수의 제자들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해마다 제야(除夜)가 되어도 종을 치러 오는 이가 없어

누군가가 종을 치러 오기를 평생 기다리다가

나는 그만 눈멀고 귀먹은 노인이 되고 말았다

종각은 단청이 벗겨지고 지붕과 기둥이 삐걱거렸다

지금 종을 치지 않으면 내 종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사람이 종을 치러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힘껏 종을 쳤다

종소리에 가슴이 와르르 죽음처럼 무너졌다

내 가슴의 종각에 매달린 종을 한번 울리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

낙타를 사랑하는 까닭 / 정호승

 

 

내가 낙타를 사랑하는 까닭은 

누구나 자기만의 사막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낙타 중에서도 쌍봉낙타를 사랑하는 까닭은

햇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고

아침이 있으면 밤이 있고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낙타를 타고 밤새도록 별을 바라보면서

당신과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싶은 까닭만은 아니다

나 죽을 때에 사막에 버려져 한 줌 모래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까닭만은 아니다 

아버지의 나이

정호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셨는지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