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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연말에 대한시 모음

려니하하 2023. 12. 31. 15:47

연말年末

     ㅡ유안진

언어는 떠나가고 휘파람 한 소절이 찾아와
준 입술이여
그 써늘한 깊이를 깊이 알아 더 춥지
춥고 쓸쓸한 끄트머리는 바닥없이 깊어질
뿐이지
생각 없이 살면 남들이 괴롭고
생각 깊게 살면 제자신만 괴롭지
깊어지지 말자, 깊어져 일상이 침몰되고
무의미 무책임 텅 빈 자유와 망각이 될 뿐
가슴 옥죄는 기다림을 기다리게 하지
슬픔도 깊어지면 황홀도 되지, 그래서 더 슬프다
오래전에 속속들이 알아버렸구나
인생이란 것에 다시 발 디밀어 다리뻗기는
글러먹었으니
분수없지 말자, 끝이 곧 처음이라는
그럼에도 불구함이여.?




송년에 즈음하면


                      유안진




송년에 즈음하면

도리 없이 인생이 느껴질 뿐입니다

지나온 일 년이 한 생애나 같아지고

울고 웃던 모두가

인생! 한마디로 느낌표일 뿐입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자꾸 작아질 뿐입니다

눈 감기고 귀 닫히고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모퉁이길 막돌맹이보다

초라한 본래의 내가 되고 맙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신이 느껴집니다

가장 초라해서 가장 고독한 가슴에는

마지막 낙조같이 출렁이는 감동으로

거룩하신 신의 이름이 절로 담겨집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립니다

일년치의 나이를 한꺼번에 다 먹어져

말소리는 나직나직 발걸음은 조심조심

저절로 철이 들어 늙을 수밖에 없습니


시집  《월령가 쑥대머리》

송년(送年)

 
                        김규동
 



기러기 떼는 무사히 도착했는지
아직 가고 있는지
아무도 없는 깊은 밤하늘을
형제들은 아직도 걷고 있는지
가고 있는지
별빛은 흘러 강이 되고 눈물이 되는데
날개는 밤을 견딜 만한지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버린
아름다운 꿈들은
정다운 추억 속에만 남아
불러보는 노래도 우리 것이 아닌데
시간은 우리 곁을 떠난다
누구일까 가고 오는 저 그림자는
과연 누구들일까
 
사랑한다는 약속인 것 같이
믿어 달라는 하소연과 같이
짖궂은 바람이
도시의 벽에 매어 달리는데
휘적거리는 빈손 저으며
이 한해가 저무는데
형제들은 무사히 가고 있는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쓸쓸한 가슴들은 아직도 가고 있는지
허전한 길에
씁쓸한 뉘우침은 남아
안타까운 목마름의 불빛은 남아
스산하여라 화려하여라.



- 시선집 < 길은 멀어도 > 미래사, 1991.

송년의 시  


                   이명희


 

가진 것 없었지만

마음만은 풍요롭게 살았습니다

눈치가 없이 우둔한 척

유순하게 살았습니다

 

정제되지 못한 것들의 균열이

심하게 범람해도

뜨거운 입김 토해내며

견디고 살았습니다

 

내려놓지 못한 삶의 무게

수많은 시간의 결을 거쳐

무의식의 심연에 도달한

가벼움 얻기까지 무거웠던 그 세월

 

이젠 아름답게 곧추세우는

배려의 감성 맛보며

시린 무릎 쓸어주렵니다.



송년인사


                         오순화




그대 올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대 올해도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그대 올해도 사랑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대 올해도 내 눈물 받아 웃음꽃 피워주고 

그대 올해도 밉다고 토라져도 하얀 미소로 달래주고 

그대 올해도 성난 가슴 괜찮아 괜찮다고 안아주고 

아플 때마다 그대의 따스한 손길은 마법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대의 품은 오늘도 내일도 세상에서 가장 넓고 편안한 집입니다 

그대가 숨쉬는 세상 안에 내 심장이 뛰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대 올해도 살아줘서 살아있음에 큰 행복 함께 합니다




- 시집 < 그대의 이름을 부르면 >  진원, 2015.

안부2
                      
                     황지우
 
 
안녕하신지요, 또 한 해 갑니다
일몰의 동작대교 난간에 서서
금빛 강을 널널하게 바라봅니다
서쪽으로 가는 도도한 물은
좀더 이곳에 머물렀다가 가고 싶은 듯
한 자락 터키 카펫 같은
스스로 발광하는 수면을
남겨두고 가데요
그 빛, 찡그린 그대 실눈에
대조해 보았으면 했습니다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지난번 엽서,
이제야 받았습니다
숨쉬는 것마저 힘든
그 공중국가에 제 생애도
얼마간 걸쳐놓으면 다시
살고 싶은 마음 나겠지요마는
연말연시 피하여 어디 쓸쓸한 곳에 가서
하냥 멍하니, 있고 싶어요
머리 갸우뚱하고 물밑을 내려다보는
게으른 새처럼
의아하게 제 삶을 흘러가게 하게요
 
 
-시집『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1998, 문학과 지성사)



섣달 그믐이 가기전에​

                                 허영자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묵은 편지의 답장을 쓰고

빛진 이자까지 갚음을 해야 하리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진 못하였으니

이른 아침 마당을 쓸 듯이

아픈 싸리비 자욱을 남겨야 하리

 

주름이 잡히는 세월의 이마

그 늙은 슬픔 위에

간호사의 소복 같은 흰눈은 내려라

섣달 그믐이 가기 전에.



송년회


                              황인숙



칠순 여인네가 환갑내기 여인네에게
말했다지
''환갑이면 뭘 입어도 예쁠 때야!''
그 얘기를 들려주며 들으며
오십대 우리들 깔깔 웃었다

나는 왜 항상
늙은 기분으로 살았을까
마흔에도 그랬고 서른에도 그랬다
그게 내가 살아 본
가장 많은 나이라서

지금은, 내가 살아갈
가장 적은 나이
이런 생각, 노년의 몰약 아님
간명한 이치
내 척추는 아직 곧고
생각 또한 그렇다(아마도)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 횡인숙시집: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 지성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