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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부러진 숟가락 이정록

려니하하 2023. 6. 16. 09:30

목이 부러진 숟가락


                             이정록
  

  어머니는 목이 부러진
  내 알루미늄 숟가락을 버리지 않으셨다
  부뚜막 작은 간장종지 아래에다 놔두셨는데
  따뜻해서 갖고 놀기도 좋았다 눈두덩이에도 대보고
  배꼽 뚜껑을 만들기도 했다
  둥근 조각칼처럼 생겼던 손잡이는
  아끼기까지 하셨다 고구마나 감자를 삶을 때
  외길로 뚫고 간 벌레의 길을 파내시는 데
  제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를 찾아뵐 때마다, 내 몸은
  탄저병에 걸린 사과나 굼벵이 먹은 감자가 되어
  한 켜 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다
  숫제, 내가 한 마리 벌레여서
  밤고구마나 당근의 단단한 속살을 파먹고
있는
  내 숟가락은 아직 생기지도 않았고
  어머니는 외할머니 댁 추녀 밑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그런 벌레 알 같은 생각을 꼼지락거리기도 한다
  숟가락 손잡이로 둥글고 깊게
  나를 파고 나를 떼내다가
  지금은 없는 간장종지 아래에
  지금은 없는 내 목 부러진 숟가락을
  모셔두고 온다

-2001 이정록 시집(제비꽃 여인숙)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