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그리기외 이승하시모음
바람 그리기
이승하
황혼의 감천으로 너를 보낸다 누이야
네가 혼자 사분거리다 냇둑을 뛰어가면
다옥한 네 머리카락 황금빛으로 빛났다
망각의 시내 이편에서 나는 지켜보았다, 너는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두려움 하나 없이
오롯이 옷을 벗었다
하나씩 발아래 옷이 쌓이면
도리암직한 네 몸 청동 빛이 났다
그때 감천은 무르춤하였고,
깊이깊이 한숨짓는 바람의 다발
울음 참고 나는 오래 지켜보아야 했다
그 무력했던 날들
누이는 어느 날부터인가
월경이 멎고, 식욕을 잃었다
낮에 웃고 밤에 바장이고
혼자 웃고 혼자 흐느끼고
잘 쉬어라 쉬어
네 곁에서 나직이 휘파람 불면
누이는 일어나 두 팔 아느작 거리며
집을 나섰다 마을을 나서
혼자 가만가만 웃다 바람이 이끌면
네 혼을 불러내는 정든 시내
그 냇둑에 서서 바람을 그리겠다고
바람의 매무새를 그리겠다고
감천아, 감천의 바람아, 착란의 이 땅아
내 누이는 영원히 어린애란다
나와 누이를 연결시켜주는 끈은 없단다
버려진 내 누이, 너는 아직 곱게도 미쳐......
* 감천 : 김천시 외곽을 흐르는 시내.
-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세계사,2013)
고물상 화엄경 / 이승하
속내를 감추고서야
이곳에 올 수 없다
금 가고 깨지고 꾹꾹 밟혀
납작하게 온몸이 짓눌린 것들
누군가의 가슴에 박혔던 대못과
전선처럼 복잡하게 얽힌 심사라야
그 일생에 값이 붙는다
어쩌다 멀쩡한 녀석이 온 적도 있었다
비닐 포장을 벗지 못했다면
쓴맛 단맛 세상을 모르는 법, 가거라
좀 더 살다 오너라
툭툭 먼지가 털려 쫓겨났다
둥글게 등이 말린 노파가
파지를 내려놓고 돌아간 무렵
고물을 걷어 오는 화물차에
철불 머리 하나 실려 있다
일꾼들이 어쩔까 손 놓고 보는데
일생 절 받던 지체 높은 쇳덩이
은은하게 눈을 뜬다
전력을 다해 살아본 생들만
가늠할 수 있는 화엄의 세계
본디 자리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천천히 불국토를 둘러본다
畵家 뭉크와 함께
이승하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드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끊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도 同化야 도 童話의 세계야
저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뼈아픈 별을 찾아서
- 아들에게
이승하
취해서 귀가하는 어느 밤이 온다면
집에 당도하기 전에 꼭 한 번
하늘을 보아라 별이 있느냐?
별이 한두 개밖에 없는
도회지의 하늘이건
별이 지천으로 돋아난
여행지의 하늘이건
뼈아픈 별 몇이서
너를 찾고 있을 테니
그 별에게 눈 맞춘 다음에야
벨을 눌러야 한다
잠이 들어야 한다 아들아
천상의 별을 찾는다고 네 발 밑에서
지렁이나 개미가 죽게 하지 말기를
통증을 느끼는 것들을 가엾어하지 않는다면
네 목숨의 값어치는 그 미물과 같지
아들아 네 등뒤로 떨어지며 무수히 죽어간
별똥별의 이름은 없어 뼈아픈 별이기에
영원히 반짝이지 않는단다.
수상문학상 : 2002년 『뼈아픈 별을 찾아서』시집으로 제2회 《지훈문학상》수상
공을 던져라
이승하
던져라 박찬호처럼 류현진처럼 혼신의 힘으로
타인의 가슴이 아닌 미트 속으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배구공처럼 때리고 탁구공처럼 치고
농구공처럼 던지고 축구공처럼 차라
내 몸은 탁구공처럼 가벼울지라도
내 마음은 골프공처럼 단단했으면 한다
올인원은 쉽게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럭비공처럼 안고 뛰어야 할 때도 있었다
사람을 헤치고서, 뿌리치고서 터치다운
목표지점까지 앞만 보고 내달려야 할 때도 있었다
경기에서는 대승도 있고 대패도 있을 테지만
인생에서는 실패만 아니면 다행이다
공의 안은 비어 있어 공空이다
비어 있어야 한다
비워낼 줄 알아야 하는데
채우려고만 했다 살아보니 공허였고
경기장 밖의 공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지구가 둥글게 생긴 것처럼
세상은 모나지 않고 둥그런 것을
그래서 혼신의 힘으로 던지는 것이다 공을, 공허를
사랑의 탐구
이 승하
나는 무작정 사랑할 것이다
죽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을지라도
사랑이란 말의 위대함과
사랑이란 말의 처절함을
속속들이 깨닫지 못했기에
나는 한사코 생을 사랑할 것이다
포주이신 어머니, 당신의 아들
나이 어언 스물이 되었건만
사랑은 늘 5악장일까 아니 女湯
꿈속에 그리는 그리운 고향 그 고향의
안개와도 같은 살갗일까 술 취한 누나의
타진 스타킹이지 음담패설 속에서만
한결 자유스러워질 수 있었고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을 땐 목청껏 노래불렀다
방천 둑길에서 기타를 오래 퉁기고
왠지 부끄러워 밤 깊어 돌아왔더랬지
배다른 동생아 너라도 기억해 다오
큰 손 작은 손 손가락질 속에서 나는
자랐다 길모퉁이 겁먹은 눈빛은 바로 나다
사랑은 그 집 앞까지 따라가는 것일까
세월처럼 머무르지 않는 것일까 낯선 누나가
흘러 들어오는 것이지 젓가락 장단에 잠 설치지만
사랑이란 다름아닌 침묵하는 것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것 쓰다듬어 주면서
네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한다고
고개 끄덕여 주는 것.
생명에서 물건으로
이승하
종種종이 사라지는 아픔은 없다
코뿔소가 사라지는 아픔은 없다
코끼리가 사라지는 아픔도 없다
나, 소비의 주체이니
돈을 벌어 물건을 살 뿐
나, 카드의 주인이니
카드를 꺼내 사인을 할 뿐
나, 승용차의 소유자이니
기름을 채워 운전을 할 뿐
때때로 자식을 데리고 대공원에 가면
코뿔소는 아직 코에 뿔이 달려 있고
코끼리는 아직도 코가 손이다
상아 있는 코끼리가 있다
코뿔 없는 코뿔소는 없다
종種은 아직도 엄청나게 많고
나는 서서히 살아간다
생명에서
나는 부지런히 사라진다
물건의 사용자로
물건으로.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 이승하
오죽했으면 죽음을 원했으랴
네 피고름 흘러내린 자리에서
꽃들 연이어 피어난다
네 가족 피눈물 흘러내린 자리에서
꽃들 진한 향기를 퍼뜨린다
조금만 더 아프면 오늘이 간단 말인가
조금만 참으면 내일이 온단 말인가
그 자리에서 네가 아픔 참고 있었기에
산 것들 저렇듯 낱낱이
진저리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 드리며
이승하
작은 발을 쥐고 발톱 깎아드린다
일흔다섯 해 전에 불었던 된바람은
내 어머니의 첫 울음소리 기억하리라
이웃집에서도 들었다는 뜨거운 울음소리
이 발로 아장아장
걸음마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이 발로 폴짝폴짝
고무줄놀이를 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뼈마디를 덮은 살가죽
쪼글쪼글하기가 가뭄못자리 같다
굳은살이 덮인 발바닥
딱딱하기가 거북이 등 같다
발톱 깎을 힘이 없는
늙은 어머니의 발톱을 깎아드린다
가만히 계셔요 어머니
잘못하면 다쳐요
어느 날부터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
고개를 끄덕이다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나 역시 말을 잃고 가만히 있으니
한쪽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맞닿은 창문이
온몸 흔들며 몸부림치는 날
어머니에게 안기어
일흔다섯 해 동안의 된바람 소리 듣는다.
아직도 어두운 이 지상에서
-‘라파엘 어린이집’ 방문기
이승하
보지 못하면서 말 못 하는 보람이
말 못 하면서 못 움직이는 은정이
못 움직이면서 자폐증인 진영이
자폐증이면서 앞 못 보는 성구
어두운 지상에 외돌토리로 버려져
다중의 장애로 괴로워하는 새싹들
라파엘 어린이집의 식사 시간입니다
밥 먹는 모습이 가지각색입니다
똥오줌을 못 가리는 보람이
밥맛이 없다고 입을 벌리지 않습니다
뇌성 소아마비를 앓았던 은정이
밥상 위로 자꾸만 고꾸라집니다
양말 하나도 못 신는 진영이
국이 맛없다고 맨밥만 먹습니다
종일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성구
숟갈질을 못 해 국을 줄줄 흘립니다
조물주가 버리신 어린이들일까요?
주말에는 부모가 데려가기도 하지만
부모가 버린 어린이들도 있답니다
그럼 엄마 아빠란 말도 모를까요?
혼자서 마냥 미소짓는 보람이
무슨 일이 종일 저렇게 즐거울까요
구석에 앉아 고개만 회회 돌리는 성구
무슨 일이 종일 저렇게 못마땅할까요
아직도 어두운 이 지상에서
새싹들을 돌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되고, 언니 오빠가 되려는
날개 없는 천사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아직도 어두운 이 지상에서
어린이들이 낑낑거리며 기어갑니다
아직도 사랑하고픈 그 무엇을 찾아
온몸으로 기어가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 계간 《미래시학》 2022년 겨울호 권두시
늘 혼자였던 섬
이승하
혼자 잠든 긴 밤들이 있었다
바람 소리 물결 소리 자장가 삼아
앓아도 혼자 앓았던 많은 밤들이 있었다
독도를 삼키려 하지 말아라
독도를 내 것이라 말하지 말아라
내 돌품에 뿌리내린 식물들이 알고 있다
내 돌머리에 깃든 새들이 알고 있다
내 돌밭에 기어다니는 바닷게들이 다 안다
나 혼자서
밤에는 동해 저 큰 바다 다스렸고
낮에는 저 뜨거운 태양과 싸웠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죽도가 아닌 독도
독도는 온전히 내 것이로다
※ 신문에 투고한 詩입니다.
마지막 포옹
―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고
이승하
용서한다고 말하지 않겠소
내 다만 조용히 다가가
그대 부둥켜안고
등 몇 번 두드려주겠소
떨고 있는 거요
내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그대 아픔
참 많이 아팠으면 더 아파하소
울고 있는 거요
참 많이 슬펐다면 슬퍼하소
우리 같은 하늘을 쳐다보며 이제껏
보고 싶은 마음으로만 살아오지 않소
기나긴 세월에 엇갈려 간 것들
그것들의 생김새가
뭐 그리 중요하겠소
그것들의 차림새가
뭐 그리 대단하겠소
사랑한다고 말하진 않겠소
내 다만 조용히 다가가
그대를 껴안겠소
잠시라도…… 으스러지도록.
- 시집 [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 문학사상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