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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시 모음

려니하하 2023. 3. 25. 22:35

향기 수업
고진하


때로 내 마음은 근심의 직물을 짜는 공장이기도 하지만

그 공장 옆으로 바람이 불고 심호흡하는 꽃들을 보며

하늘하늘 너풀너풀 내 근심은 간데없이 날아가기도 하지


꽃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봄, 저 나른한 봄의 학교에서

개화도 낙화도 생을 단련하는 수업이지만

나비나 벌들이 잠깐 향기 은은한 꽃술에 앉아

평정을 누리는 향기 수업의 자리를 곁눈질하다

봄날이 다 갔네


행인 같은 봄이 끌고 사라진 꽃수레의 체온이

마른 잎맥에서 가슴 언저리께 남아 잔물결을 일으키지만

숱한 이별과 친해져야 할 누덕누덕한 날들 위로

성큼 다가올 여름이 심호흡하는 소리를 듣고 있네​

시집 《명랑의 둘레》 문학동네 . 2015

모란  
                     고진하

꽝꽝한 한겨울 돌담 아래

모란(牧丹),

꽉 다문 묵언의 입술처럼

깊은 침묵에 잠겨 있네.



저 단단한 목질을 뚫고 나올

연둣빛 말씀의

봄은 아직 먼데

얼마 전 저승 떠난

노모의 사망신고서

아직 잉크도 덜 말랐을 텐데



달관일까, 아님 체념일까

모란 둘레에

지그시 눈길 던지며 아내가 중얼대네

나 죽으면

저 밑에 묻어줘요



들을 귀 있어 들었다면

올봄

연둣빛 받침 위로

벌어질 모란꽃 더욱 붉겠네

- 시집『명랑의 둘레』문학동네, 2015.

당신 발을 씻기며  ---   고진하
오늘은 당신 귀빠진 날,

뭘 선물할까 곰곰 생각하다가

세숫대야에 더운물을 떠다가 당신 발을 씻기네

잠들 때를 제외하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부엌에서

마당으로, 텃밭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우리 식구들을 살렸던 살림의 으뜸

당신 발에 입을 맞추네


당신 자신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나 역시 무심했던

당신 발의 노고(勞苦)를 모처럼 기억하는 시간

발톱조차 마모되어 그 흔적만 남은

새끼발가락, 한 방울 눈물처럼 선연하네


어떻게 이런 신통한 생각을 했죠?

그냥! 씻겨주고 싶었소,

 

발, 살림의 으뜸, 그냥

어루만져주고 싶었어

우리 식구들 흔들리지 않게 하는 지축이잖아

흔들리는 것이 유한한 인간의 운명이지만

당신 발은

운명 따위를 과감히 밟고 지나가곤 했잖아

 

당신 자신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나 역시 무심했던 발에

물을 끼얹어 부드럽게 어루만지네

잠들 때를 제외하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부엌에서

마당으로, 텃밭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우리 식구들을 살렸던 사랑의 으뜸

당신 발에 입을 맞추네
시집 《야생의 위로》